하나님은 다 아시면서 용서하시고, 인간은 다 알면서 죄를 짓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도 실수할 수 있으며, 반복해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용서 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창세기를 읽다 보면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 드러내 놓고 실수하는 장면이 16:1-6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산 것이 75세 때입니다.

     그가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초창기의 이야기가 창세기 12-15장까지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5장에서 상속자, 곧 후손에 관한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하십니다. “네 후손을 하늘의 뭇별처럼 많게 해 주겠다.” 그리고 10년이 흘렀습니다. 10년 후니까 아브라함이 몇 살입니까? 85세입니다. 10년을 기다렸는데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수표를 날리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힘들고 답답한 나날이 지속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실수는 바로 이런 때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힘들고 답답하면 딴 마음을 품습니다. 현실적인 좌절감은 사라에게 부정적인 생각과 인간적인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늘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형편에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서와 감정에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실이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입장이 한번 되어 보시라고요!”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별로 죄책감을 갖지 않고 쉽게 그 방법을 따라 행동합니다.

     사라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 내가 이 나이에 육체적으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내 몸종인 하갈이 있잖아. 이 아이를 통해 자식을 번성시키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현명한 방법일 거야.” 이런 생각이 사라의 마음 속에 점점 더 크게 자리 잡아 가고 있었습니다. 사라는 자신이 임신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해 버렸습니다. 사라는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몸을 통해 후손을 이어가리라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제 끝났다고 단정해 버린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아기를 못 낳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 같아.”라고 하나님의 계획에 마침표를 찍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진행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시 쉼표를 찍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사라는 자기 마음대로 단정해 버렸다. “내게 아이는 없다. 내게 하나님의 뜻은 없다. 약속도 없다.” 무슨 일이든지 불가능해 보이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라도 미리 단정하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진행형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쉼표’이지 ‘마침표’가 아닙니다. 아무리 칠흑 같은 어두운 밤에도 여명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새벽은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고통과 극도의 불안한 속에서 내뱉은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동의해 줘 버렸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그가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사라의 제안을 거절했어야 옳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의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내 몸 종을 통해 아이를 낳으십시오.”라는 말이 사래의 진심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투정이요, 갈등의 표현이었습니다. 하갈이 임신을 하고 난 후에 사라가 보인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창세기16:6) 이런 결과가 올 것을 알았다면 이때 아브람은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여보, 당신이 오죽하면 이런 말을 하겠소. 포기하지 마. 절대 그러면 안 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 기다립시다.” 이렇게 임신하지 못하는 아내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할 일이지 않습니까? 결국 하갈은 임신했고, 사라와 하갈의 갈등으로 인해 중간에서 아브라함은 고래 등이 터졌고, 해가 바뀌어 아브라함은 86세에 드디어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지만,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했지만 어쨌든 아브라함에게 상속자가 생겼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까? 하나님께서 ‘어 그래, 잘했다. 내가 못한 것을 너희들이 해냈구나.’하고 칭찬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뜻은 이스마엘이 아니고 이삭이다. 하갈을 통해서가 아니고 사라를 통해서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답답해도 인내하며 참고 기다리면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면 쓰디쓴 ‘이스마엘’이라는 육신의 열매를 거둡니다. 이런 실수투성이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로마서4:19-22)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죄의 본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수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수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은 그의 믿음이 절대적이어서거나, 그의 행동이 의로워서이거나 그가 실수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형편없고 결정적인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계속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고백합니다.“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아시면서도 용서하시는 하나님,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 여전히 죄 짓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믿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사람으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수가 없군요.’라고 고백하시고, 감사하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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