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전 다스 자금 횡령과 삼성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장고 끝에 항소를 택하기로 결정했다. 이 전 대통령은 1심에서 징역 15년이 선고되자 항소 포기는 물론 재판 불출석까지 고민했었다. 그런 그가 항소 쪽으로 마음을 굳힌 건 사법 절차를 따르는 것이 그나마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검찰이 항소한 이상 항소를 포기한다면 다스의 실소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 될 뿐 아니라 직권남용 등 무죄 판결이 나온 부분마저 유죄로 뒤집힐 위험이 있다. 또 재판을 전면 거부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례도 반면교사로 작용했을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본인의 재판을 두고 “법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이라며 항소를 포기한 채 법정에도 나오지 않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호소하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이런 행보는 1·2심에서 모두 중형 선고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대한민국 제 17대 대통령인 이명박은 1심에서 징역 15년, 벌금 130억 원, 추징금 83억 원을 선고받아 '치욕의 전 대통령'의 명단에 합세하게 되면서 사리사욕을 채우려다 구속된 역대 4번째 대통령이란 오점을 헌정사에 남기게 됐다. 하야, 피살, 수감 등으로 점철된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이 유독 MB만을 뛰어넘어 박 전 대통령에게 닥쳤나 했더니 MB도 예외가 아니었다. 왜 대한민국 전 대통령들은 비운의 지도자로 끝을 맺는 것일까. 우리 헌정사 70년에 11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이 중 8명이 비운의 대통령이었고 3명만이 온전했지만 이들 역시 평탄치 않은 말년을 보냈다.

    초대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장기 독재 집권을 하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 혁명으로 쫓겨나다시피 하야했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 속에 외세와 접하면서 줄곧 억압받던 땅에 대한민국의 태동으로 초대 대통령을 맡은 이승만. 격변기에 대통령을 역임한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대명사였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미국에서 펼치다 귀국했지만 국내 기반이 없는 탓에 나라를 세우는 데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인의 장막’에 갇혀 ‘어두운 독재자’라는 오명을 안은 채, 고국을 등지고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고독에 신음하다 눈을 감았다.

    이후 장면 내각과 윤보선 대통령(4대)이 잠깐 출범했지만 박정희에 의해 물러났다. 박정희 전 대통령(5~9대)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찬탈한 후 18년간 장기 집권했지만 최측근이었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시해됐다. 그에게 붙여진 타이틀은 너무 많았다. 최장기 재임 대통령, 최연소 대통령, 최초의 군인 출신 대통령, 최초로 저격당해 죽은 대통령 등. 어쨌든 그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중의 한명으로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말로는 비참했고, 그의 업적은 문민정부 이후 독재자로 평가절하되어 있다.

     헌정사의 치욕의 절정은 전두환(11~12대)과 노태우(13대)로 이어진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역시 퇴임 후 모진 수난을 당했다.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은 1979년 10·26 사건 이후 `12·12 군부 쿠데타' 등 총칼을 앞세워 차례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하지만 후임인 김영삼 정권 시절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년 가량 복역하다 사면조치로 풀려났다. 1995년 12월, 오랜만에 국민 앞에 나타난 전씨는 12·12, 5·18 등 자신이 주도했던 사건에 대해 사죄나 사과는 커녕,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않고 검찰의 소환에 불응하겠다고 밝혔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도 6공 당시의 율곡사업, 원전건설, 신공항건설, 고속철, 제2이동통신 등 대형 공공사업과 관련된 뇌물 특혜 시비와 함께 토지 빌딩 증권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은닉혐의를 받았다. 박정희 정권 19년과 전두환, 노태우 13년간 집권 기간을 합한 32년간의 집권은 김대중, 노무현 민주정부 10년간의 집권으로 회복하기는 역부족의 세월이었다.

     사실 ‘퇴임 후 사법 처리’ 불명예를 벗어난 전직은 김영삼(14대)과 김대중(15대) 전 대통령뿐이다. 하지만 이 두 전직마저 말로는 아들 등의 비리와 국민 공분 등으로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비리에 연루된 대통령 아들이 처음으로 법의 심판대에 오른 건 김영삼 전 대통령의 둘째 아들 현철씨부터다. 현철씨는 검찰에 두 번이나 구속됐다. 현철씨는 아버지 임기 말인 1997년 기업인들로부터 66억여 원을 받고 12억 원을 탈세한 혐의로 1997년 구속기소됐다. 1999년 서울고법 파기환송심(징역 2년)에 재상고장을 냈다가 번복하는 곡절 끝에 광복절 특사로 사면·복권됐다.

    이어 2004년 두 번째로 구속기소됐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조동만 전 한솔그룹 부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20억 원을 수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대법원에서 집행유예형이 확정된 뒤 2007년 다시 사면·복권됐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로도 평탄치만은 않았다. 아들 3명이 모두 비리 혐의로 기소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 두 아들은 김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을 때 구속됐다. 차남 홍업씨는 2002년 7월 20억 원의 불법자금 수수 등의 혐의로, 막내 홍걸씨는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과 관련 36억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김영삼 이후 제16대 대통령인 노무현(16대)은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한 뒤 5공비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고,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퇴임한 뒤 고향인 봉하마을로 귀향하였으나 재임중 친인척 비리로 조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자살해 생을 마감했다.

    박근혜(18대) 전 대통령은 비선실세 최순실에게 휘둘려 자행된 국정농단에 대한 징벌로 징역 24년과 벌금 180억 원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또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를 상납받은 것과 공천과정 개입 관련 선거법 위반으로도 8년의 징역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징역 32년을 선고받았는데, 나이를 감안하면 종신형이나 다름없는 형벌이다. 취임 당시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부녀가 모두 대통령에 취임한 `부녀 대통령'이란 기록을 세웠지만 탄핵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며 나락으로 추락했다.

    이처럼 초대 이승만은 12년간 집권 후에 하야하고 망명지에서 별세했으며, 윤보선은 내각제의 대통령으로 5·16 쿠데타로 물러났고, 최규하는 말 그대로 '임시 대통령'이었다. 박정희는 장기 집권 끝에 부하에게 총 맞아 사망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 사건 등으로 퇴임 후 감옥살이를 했으며 노무현은 퇴임 후 자살했다. 박근혜는 임기 중 탄핵으로 파면되었고, 곧바로 이명박은 15년을 선고받았다. 이것이 한국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처벌 역사다. 나라의 최고통치자인 대통령과 관련된 한국 현대사가 그만큼 굴절이 심했음을 반영한다.

    이처럼 잘못된 부분들만 부각이 되다 보니, 이 곳에서 자라나는 우리 2세들에게는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대통령은 모두 수갑 채워지고 감옥에서 여생을 보낸다는 이미지가 각인될까 두렵다. 더구나 지난해 박정희 100주년 기념 우표는 철회되었지만, 최근 북한의 김정은과의 정상회담 기념 우표가 발행되는 것을 보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보다도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재임시절 잘했던 부분은 아예 없었던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이쯤에서 잘한 업적들을 재평가해 보는 시간도 필요해 보인다.

     지금까지 청와대에서 나오면 모두 불행해지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뒷모습은 참담하기만 하다. 짧은 민주주의 역사에서 빈번하게 반복되는 전직 대통령의 오욕과 단죄는 우리의 잘못된 '제왕적 대통령' 문화와 권력구조 시스템에서 파생된 요인이 컸다. 과연 우리의 전직 대통령, 현 대통령, 미래의 대통령이 오붓하게 앉아 웃고 떠들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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