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살만 왕세자, 반정부 언론인 암살 지시 정황 드러나

    중동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의 33세 왕세자를 두고 국제사회가 혼란과 충격에 빠졌다. 사우디 여성 운전 허용과 석유 의존 경제 탈피, 서구 문화 개방 등 잇따른 개혁 조치로 찬사를 받던 무함마드 빈살만(33·사진) 왕세자가, 무자비하고 난폭한 독재자라는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내면서다. 그의 폭정(暴政) 의혹은 그간 국제 인권단체에서 계속 제기해왔지만, 이번에 결정타가 터졌다. 지난 2일 터키에서 벌어진 사우디의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쇼기 암살 의혹 사건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11일 “미 정보 당국은 빈살만이 공안 당국에 ‘카쇼기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파악했다”고 보도했다. 터키 당국은 사건 당일 시신 해부 전문가가 포함된 15명의 ‘사우디 암살팀’이 입국했고, 그들이 이스탄불 사우디 영사관에서 카쇼기를 토막 살해했으며, 피살 현장의 음성·영상까지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다.

    빈살만의 공격성은 그가 왕세자에 오르기 전 국방부 장관일 때부터 엿보였다고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전했다. 빈살만은 2015년 30세의 나이로 국방장관에 오르자, 군 참모진과 상의도 않고 예멘에 대한 공습 명령을 내렸다. 공격 타깃에 대한 충분한 정보 수집 없이 이뤄진 공습으로 민간인 피해가 속출했다. 지난 8월엔 사우디 공습으로 예멘 통학버스가 폭파돼 어린 학생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가 국방장관에 오른 이후 지식인과 언론인의 해외 망명이 급증했다. 외교 전문지 FP에 따르면, 2016년 미국에 망명 신청을 한 사우디 국민은 47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지난달엔 수천 명이 반정부 활동을 이유로 구금됐다가 ‘충성 서약’을 하고 풀려났다.

    빈살만은 왕위 계승권도 힘으로 빼앗았다. 그는 작년 6월 서른 살 많은 사촌형이자 당시 왕세자였던 무함마드 빈나예프를 기습적으로 감금하고 왕위 계승권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빈나예프는 군·정보기관을 장악한 그에게 왕위 계승권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왕세자에 등극한 빈살만은 노쇠한 살만 국왕 대신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그는 이때부터 ‘모든 걸 할 수 있는 남자’라는 뜻으로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이라 불렸다. 이 ‘궁중 쿠데타’ 이후 빈살만에게서 돌아선 대표적인 인사가 언론인 카쇼기였다.

    빈살만은 사우디 역대 어느 지도자보다 독단적인 방식으로 정책 결정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더타임스는 9일 “빈살만은 사우디 서부 해안도시 제다 연안에서 5억달러짜리 요트를 사실상의 집무실로 삼고 지내며, 극소수의 비선 측근과만 국정을 논의한다”고 전했다. 그간 빈살만은 국제 무대에선 ‘중동의 새바람’이라 불릴 만큼 매력 공세를 펼쳤다. 사우디 여성의 운전 허용, 종교경찰 활동 제한, 이슬람 근본주의 와하비즘과의 단절 선언, 그리고 ‘탈(脫)석유경제’ 표방과 정보기술(IT)·벤처 투자 등 다양한 개혁 조치들을 실행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그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 등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의 무기를 1100억달러어치 구입하고 미국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는 데 찬성하는 파격적 외교정책도 취했다. 글로벌 기업들의 사우디 투자 약속이 최근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카쇼기 암살을 계기로 사우디 경제·사회 개혁이 공중분해될 가능성까지 거론된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분석했다. 사우디에 몰려들던 글로벌 기업들이 불확실성을 이유로 속속 투자 계획을 접기 때문이다. 오는 23~25일 예정된 사우디의 글로벌 경제포럼도 미국·영국의 언론·기업들이 지난 9일부터 줄줄이 취소를 통보하면서 행사 자체가 무산될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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