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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신성일, 폐암 투병 끝에 별세
잘 몰랐던 그의 과거
2018년 11월 08일 (목) 08:34:23 weeklyfocus weeklyfocus@focuscolorado.net
    지난 4일 새벽, 배우 신성일씨가 폐암으로 별세했다. 1962년 첫 주연작 <아낌없이 주련다>를 시작으로 주연작만 506편인 그가 출연했던 작품들은 그대로 한국 영화사가 되었다. 신성일의 이력이 곧 ‘한국 영화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큰 족적을 남긴 배우다. 그의 영전엔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송해 선생을 비롯해 신영균, 최불암, 이순재, 안성기, 문희, 이창동, 조인성 등 다수의 영화계 동료·후배들이 다녀갔다. 또 한때 정치에 몸담았던 그의 경력답게 이회창, 김병준, 유승민 등 유력한 정치인들이 조문했다. 그의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졌으며 6일 오전 10시 영결식이 진행됐다. 하지만 최근까지 대중들에게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그의 ‘영화인생’이 아닌 개인사가 얽힌 가십거리들이었다. 언론을 통해, 대중의 입을 통해 확산된 신성일씨의 말년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영화인 신성일의 모습을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신성일·지승호 지음)를 통해 알아보려고 한다.

▶호떡 장사를 하던 청년, 신상옥 감독의 눈에 들다
    대구시 중구 인교동 한옥 마을에서 태어난 신성일씨는 공무원이던 홀어머니 아래서 “애비 없다는 소리 듣지 말고 얼굴값 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당시 명문인 경북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대로였다면 서울대를 갔었을 거라는 시절이었지만 어머니의 계가 깨져 어머니는 야반도주를 하고 신성일은 대구 이모 집으로 간다. 대구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던 청년 신성일은 혈혈단신 서울로 상경했다. 대학에도 떨어지고 호떡 장사를 하던 시절, 어머니는 그런 상황을 부끄러워 하셨지만 노배우는 그 시절을 “주위 눈치 보지 않고 나를 키워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르던 시절”이라 회고했다. 꿈이 원대했던 청년은 엑스트라 배우를 전전하는 대신 2640명이 몰린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 신인 배우 모집 현장을 당당하게 찾았고, 대번에 신 감독에게 “나하고 함께 일해보자”는 소리를 듣고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은희 배우 중심의 신필름의 시스템에는 젊은 배우 신성일이 들어갈 자리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제 중년에 접어든 김진규, 최무룡을 대신할 젊은 배우를 찾던 극동 흥업의 대본을 접했고, 군 입대 전 마지막 작품으로 그것에 도전하리라 마음 먹는다. 그리고 드디어 1962년 당시 인기 있던 라디오 드라마를 영화화한 <아낌없이 주련다>를 통해 ‘라이징 청춘스타’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이어 <가정교사>에 출연했고, 1964년 드디어 당시 6대 신문이 입을 모아 ‘새로운 배우’의 탄생을 알렸던 <맨발의 청춘>에 출연,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다.

▶10년 동안 한국 인기를 독차지한 신성일
    1960년대는 한 해 200여 편 넘는 영화가 만들어지던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다. 해방, 6.25. 4.19, 5.16의 격동기를 거치고 라디오 말고는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없던 그 시대 대중들에게 잘 생기고 예쁜 남녀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는 열광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1960년 태평로 사옥이 있던 옆에 아카데미 극장을 열었다. 당시 극장과는 차별된 분위기에 젊은이들이 몰려들었고, 그런 젊은 관객들의 취향에 맞춰 개봉된 영화가 바로 <맨발의 청춘>이었다. 불과 18일 만에 만들어진 이 영화의 두 남녀 주연배우 신성일-엄앵란은 당시 <조선일보>가 제정한 청룡영화상 인기상 후보들 사이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10년 뒤인 1973년까지 인기상은 배우 신성일의 몫이었다. 신성일은 196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 소설 당선작이었던 <흑맥>으로 이만희 감독을 만난다. 그리고 다음 해 <만추>를 찍게 되는데, 신성일은 이만희 감독에 대해 “머릿속에 콘티가 다 들어있는 훌륭한 감독”이라 평하며 “<만추>는 구성, 배우들의 연기, 작품의 짜임새, 영상, 연출 기법에 있어서 완벽에 가까운, 내가 출연했던 작품 중 최고의 예술작품이었다”라고 회고한다.

    1967년에 47편, 1967년에 51편 등 다작을 하던 신성일은 신춘문예 당선작 <무진 기행> 등을 컷백(cut back) 등 새로운 연출 기법을 도입한 김수용 감독과 함께 한다. 개정된 영화법으로 우수 작품을 제작하면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져 너도 나도 ‘문예 작품’을 영화화하던 시절에 신성일은 황순원, 김동인, 심훈 등 한국 문학 전집에 나오는 소설가들의 작품 모두의 주인공이 되었다. 1977년 <겨울 여자>로 58만 명을 동원하며 공전의 히트를 쳤지만, 1976년에는 134편 총 제작 영화 중 7편, 1977년에는 9편, 1978년 4편 등으로 그가 출연한 영화는 급격하게 줄어들며 배우 신성일의 시대는 저물어 갔다.

▶‘더빙 시대의 스타’라는 한계를 넘다
    배우 신성일이 말하는 연기론에서 가장 첫 번째로 꼽는 것은 ‘자기 관리’다. 안타깝게도 말년의 그는 가십성 스캔들로 대중들에게 소비되었지만, 한참 활동할 당시에는 이렇다 할 스캔들이 없었다. 아니, 스캔들이 날 시간이 없었다는 게 정확하달까. 한 해에 수십 편이 만들어 지던 시대,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작품이 동시에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는 24시간을 4등분해서 어떤 날은 8편을 찍으면서 10년 이상을 보냈다. 그가 그렇게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배우 학원 시절부터 체력 관리, 몸 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대종상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던 그는 1968년 자신의 목소리로 연기한 <이상의 날개>로 남우주연상을 탔다. 이후 <길소뜸> <위기의 여자> <레테의 연가> 등에서 계속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을 하여 ‘더빙 시대의 스타’라는 한계를 넘어섰다. 청춘스타로 출발한 그이지만, 1960년대 후반엔 문예 영화로, 다시 <내시> 등의 사극부터 액션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에 출연하며 변신을 거듭했다. 시대를 냉철히 분석하고, 그 시절의 영화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내리고 감독과 배우들에 대해 애정을 놓치지 않던 배우. 하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생활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후배 영화인들 중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며 아쉬워하는 노년을 보냈고 이제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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