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에 보면 제자 자공의 질문에 스승인 공자가 이렇게 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자공이 물었습니다. “스승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어떤 사람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까?” 공자가 답합니다. “아직 속단해서는 안 된다.” 다시 자공이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까?” 공자가 다시 답합니다. “역시 아직 속단해서는 안 된다.” 공자는 제자의 질문이 극단에 치우칠 우려가 있음을 알았기에 ‘좋고 나쁨’에 대한 평가를 유보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좋은 사람에 대한 분명한 답을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향인지선자 호지(鄕人之善者 好之) 기불선자 오지(其不善者 惡之)” 무슨 말일까요? 해석을 하면 “마을 사람들 중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공자의 말을 접하면서 이런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는 사람에 대한 ‘좋고 나쁨’의 평가를 너무 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섞여 있습니다. 누가 나쁘고 누가 좋은지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쉽게 판단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판단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주관적이며 이해 타산적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생각은, 그러면 누가 좋고 나쁜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사람들, 즉 공자가 말하는 ‘선한 사람’ 그리고 ‘선하지 못한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선’입니까? 일반적으로‘선’은, ‘가치’의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보면 선한 사람인지 선하지 않은 사람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가치가 뭘까요? 하나님 나라의 핵심 가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선한 가치가 무엇입니까? 이 가치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함께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가치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적 가치를 저는 ‘섬김’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섬김의 가치’를 부단히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일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저희 교회에서 구약성경 ‘사무엘서’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초반 1,2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홉니와 비누하스)과 어린 사무엘을 대조해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성경의 평가가 이렇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에 대해서는 ‘행실이 나빠’(사무엘상2:12)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당시로서는 제사장들인데 ‘나쁜 사람’들입니다. 사무엘에 대해서는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사무엘상2:26)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은총’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토브’인데, ‘좋은’ ‘선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대로 하면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람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왜 좋은 사람인가 하면, 그는 ‘섬김’을 배우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에 대하여 언급할 때 사무엘서 기자는 반복해서 그가 ‘섬기니라’(사무엘상2:11), ‘섬겼더라’(사무엘상2:18), ‘섬길 때에는’(사무엘상3:1)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엘리 제사장 앞에서(under Eli) 제사장 수업을 받고 자랐습니다. 제사장의 가장 큰 덕목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에게는 이 ‘섬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린 후에도, 제사를 드리기도 전에도 하나님의 제물을 강탈했습니다. 자신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제사장이라는 특권을 이용하여 힘으로 하나님의 제물을 빼앗고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 어떤 사람의 지위와 그에 따르는 특권이 ‘섬김’이 되어야지 힘이 되고 권력이 되면 ‘나쁜 행실’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만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지위를 박탈하셨습니다.

      사무엘서 기자는‘사무엘은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사무엘상2:18)고 말씀합니다.‘에봇’은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집례할 때 입는 ‘앞치마’형태의 옷입니다. 일반 제사장들은 ‘세마포 에봇’을 입었지만, 대제사장은 형형색색실로 수를 놓고 12보석이 박혀있는 ‘에봇’을 착용했습니다. 실제적인 이 에봇의 기능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형태적으로 보면 ‘앞치마’입니다. 앞치마의 상징성이 뭘까요?‘섬김’입니다. 제사장은 이 에봇이라는 앞치마를 입고 하나님을 섬기며 백성들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에봇’을 입으신 적이 있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해 허리에‘수건’을 두르셨습니다. 이 수건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강 아름답고 거룩한‘에봇’이 아닐까요? 구약의 제사장들이 입었던 화려한 에봇이 아니라 더러운 발을 씻기는 수건이라 할지라도, 제자들을 섬기기 위해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이기에 그렇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한국의 한 신부님이 강의를 하는 것을 들으며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신부님이 강원도 시골 성당의 본당신부로 일을 하시는데 교인 중에 한 여자 분이 이런 고충을 털어 놓더랍니다.“신부님, 저희 시아버님이 73살이신데 하루 종일 집에만 계셔서 하루 세끼를 수발해 드리느라 죽겠습니다. 제 시간을 가질 수가 없어요. 신부님이 우리 시아버지를 한 번 만나 주세요.” 그래서 이 할아버지를 만나서 물었답니다. “할아버지, 왜 하루 세끼를 꼬박 집에서 드세요. 점심정도는 노인정에 나가셔서 친구들과 드셔도 되잖아요? 그래야 며느리가 숨통이 좀 트이죠.” 그랬더니 이 할아버지가 그러더랍니다. “나 노인정 가기 싫어!” 의아해서 신부가“왜요? 할아버지”하고 물었습니다.

      이 할아버지 왈, “노인정가면 형들이 심부름 시켜서 가기 싫어. 커피 타와라, 담배 사와라, 맨날 나만 시켜.”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사는 주변에 섬김이 실종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위의 공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예수님처럼 살면 ‘좋은 사람’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 ‘섬김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스스로“나는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에봇, ‘섬김의 앞치마’ 곧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섬김의 삶을 실천하고 살므로, 사무엘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도 ‘너 참 좋은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로 부터도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인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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