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으니까 80년대 초쯤이었을 것이라 기억된다. 당시는 국가안보법 위반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동시에 우리 학생들은 투철한 반공 정신에 대해 배웠다. ‘간첩신고는 113’이라는 문구가 지금까지도 뇌리에 남아있을 정도이다. 삐라를 주워 우체통에 넣는 그림 위에 ‘불온 삐라를 보면 즉시 신고합시다’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가 전봇대에 항시 붙혀져 있었는가 하면, 일반인이 간첩을 잡고 경찰이 총을 겨누고 있는 그림 위에는 ‘민경이 한마음으로 간첩을 잡아내자’, ‘너와 나의 방첩이 우리 살림 보호한다’는 등 육군본부가 제작한 반공 포스터도 자주 본 기억이 난다.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는 군 소속으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녀를 대상으로 매년 교육을 시켰다. 그래서 우리 사남매는 돌아가면서 그 교육이라는 것을 받으러 갔다. 그 교육은 정신 교육으로 일종의 반공 교육이었다. 거기서 필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단막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이승복 군은 할머니와 부모 형제와 다함께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1968년 12월 어느 날 이승복 군의 가족 7명 중 할머니와 아버지는 이삿짐을 날라주러 가고 집에는 5명만 남았을 때였다. 이날 밤 이승복 집에는 당시 울진 삼척지구에 침투한 북괴의 무장 간첩들이 북한으로 도망가는 중에 이승복군의 집으로 들이닥치면서 행복했던 집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북괴 간첩들은 이승복과 가족들에게 공산당에 대해 선전을 했는데 이때 이승복군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해 북괴 무장간첩들은 이승복 군의 입을 찢는 만행을 저질렀고, 결국 이 군을 처참하게 죽였다.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도 돌로 내리쳐서 모두 처참하게 죽여버리고 승복군의 집에서 먹을 것을 훔쳐 달아났다. 이것이 주요 내용이다. 즉 이 영화는 북한의 만행을 알려 국민들의 반공정신을 투철하게 정착시키기 위해 제작 상영되었다. 그리고 필자는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간첩으로 의심될 수 있는 사람의 유형, 신고 절차 등을 배우며 북한은 결코 우리 대한민국과 함께 갈 수 없는 무자비하고 악랄한 집합체라는 것을 배웠다. 당시만 해도 ‘북한’이라는 명칭보다는 ‘북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릴 적 북한에 대한 이미지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정신교육 프로그램은 시대적 요구였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어릴 적 유명했던 영화 중  ‘똘이장군’이 있었다. 북한의 불쌍한 소녀 숙이는 공산당의 부하들에게 붉은 수령의 생일선물로 산삼을 캐오라는 명령을 받고 금강산을 헤매다가 바위에서 굴러떨어지게 되는데, 이때 깊은 산속에서 동물들과 생활하며 숲속의 장군으로 불리던 ‘똘이 장군’이 숙이를 구해준다. 숙이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똘이는 부모님이 탈북을 기도하던 중 붙잡혀서 자신이 버려지게 된 것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이와 동시에 공산당은 붉은 수령의 탄신일이 다가오자 “빨리 땅굴을 파라” “산삼을 캐오라”라며 강요하는데, 이를 알아차린 똘이가 숲속의 동물 친구들과 강제노역 중이던 아버지를 구출하고 ‘북한 괴뢰’를 무찌른다는 내용이었다.

       똘이 장군 영화 속에서 북한의 수괴는 붉은 망토를 두른 돼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촌스럽고 어색한 내용이지만 그 당시에는 얼마나 손에 땀을 쥐며 재미있게 봤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로 인해 많은 어린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북한 사람들은 머리에 뿔이 나있고, 피부 색도 빨간색인 줄 알았다. 그만큼 영화가 주는 임팩트는 강했다. 아이들이 보는 만화영화조차 북괴를 물리치는 반공영화로 제작되었고, 학교에서는 단체관람을 가기도 했다. 당시의 남북한 분위기는 그야말로 극한 대립이었다.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 난 시기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도 우리가 교육받고 본 것만 믿었으니, 북한측의 어린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런 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북한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겼다. 그러다 남북교류가 물꼬를 트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이 이루어지고, 평양 시가지가  TV에 보이면서 ‘북한의 전 주민들은 굶주리고, 땅굴만 파고, 자칫하면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지며, 공산당 간부 일부만 김일성과 김정일을 지지하며, 공산당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라고만 알려준 한국 교육에 의심을 갖게 되었다. 한때 우리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국가는 대한민국이라고 배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우리가 북한의 존재를 무시해온 사이, 자기들의 방식대로  세계와 소통을 하면서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었다.

       최근 북한의 위상은 놀랍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찾았던 세계 최강 국가 미국의 주요 국정 인물들과 어깨동무를 하는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북한의 존재가치를 최고치로 끌어올리고 있지 않은가. 얼마 전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 아들에게 한국의 대통령이 누구냐는 물음을 던졌다.  둘째 아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김정은은 아는데…” 미국에 사는 아이들도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은 모르지만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의 이름은 알 정도이니, 북한의 대외 인지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아 보인다. 이제 이승복군과 똘이장군의 스토리가 안먹혀 들어갈 지도 모른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고, 우리의 눈과 귀도 틔였고, 상대를 비난만 하는 방법은 이미 설득력을 잃어 보인다. 오히려 지금 전세계는 북한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설령 그것이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할 지라도. 일례로 이번 2차 북미정상회담 장소로 가기 위해 김정일 위원장은 비행기가 아니라 열차를 선택했다. 평양에서 베트남 하노이까지는 4500㎞다. 여정이 60시간 이상인 ‘고난의 열차행군’이다. 대외선전, 안전성 등 복합적 의도가 있을 게다. 그러나 21세기에 5시간 걸리는 비행기 대신 60시간이 소요되는 열차를 택한 것을 이해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김 위원장이 비행기 대신 전용열차로 중국 대륙을 지나 하노이로 가는 길을 선택한 것은 북·중 친선관계를 과시하고 대미 협상력을 높이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정치적 이벤트 성격이 짙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해야 할 일은 ‘60시간 열차 여정’이라는 이벤트로 세계의 관심을 끄는 게 아니라, 자신이 밝힌 비핵화 의지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는 북한의 대외 인지도를 높이고, 협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갖가지 쇼를 벌이겠지만, 더이상‘비핵화’라는 전세계의 희망을 실망으로 전락시켜서는 안된다.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