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유독 생선을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생선 요리를 자주 먹었다. 그때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진 일본 물고기가 밥상에 오르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 같다. 지난 12일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는 “한국이 후쿠시마현 등 일본 8개 현 수산물을 수입 금지한 조치는 WTO 협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서 대한민국의 손을 번쩍 들어주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 우리나라는 해당 지역의 수산물 수입을 전면 금지해왔다. 이를 두고 일본은 과도한 조치라면서 세계무역기구에 한국을 제소했는데, 지난해 1심에서는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지난주 최종심에서는 전세계의 예상을 뒤집고 대한민국이 역전승을 거두었다. 한일이 4년간 무역 분쟁을 벌인 결과이다. 이는 우리의 수입제한 조치가 타당하다는 건데, 이렇게 1심의 결론이 뒤집힌 건 처음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기에 일본의 입장은 더욱 당혹스럽다. 발표 직후 아베 총리, 수산청장관, 외무성 담당관리, 그리고 자민당까지 나서서 대책회의를 벌였고, 아사히 신문은 '한국의 예상 외의 역전 승소'라는 타이틀을 달고 보도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후쿠시마현 등 일본 8개 현 수산물 50개 품목을 수입 금지했다. 이후 2013년 원전 사고 복구 현장에서 방사능 오염수가 바다로 유출된 사실이 알려지자, 수입 금지 품목을 8개 현 수산물 전 품목으로 확대했다. 이에 일본은 WTO 협정이 금지한 '부당한 수입 제한 조치'에 해당된다며 WTO에 한국을 2015년에 제소했다. 고등어, 대구, 멍게 등 2014년 이후 방사성 물질이 기준치 이상 검출되지 않은 28개 품목에 대해 수입 금지를 풀라는 취지였다. WTO 분쟁 심판은 2심제이다. 1심은 일본이 이겼다. WTO는 일본산 수산물의 방사능 검사 수치가 다른 나라와 비슷한데도 일본 수산물만 수입 금지하는 것은 한국의 포괄적 금수 조치가 필요 이상으로 ‘무역 제한적’이라는 이유였다. 1심 때 일본은 방대한 데이터를 근거로 수산물에서 세슘 등 방사성 물질이 안전기준 이상 검출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수산물뿐 아니라 해양과 토양 등에서도 모르는 피해가 나올 수 있다고 맞섰다.

     하지만 최종심의 판단은 달랐다. 핵심은 수산물 자체의 현재 위험성만으로 판단하느냐, 아니면 원전사고가 난 일본의 특별한 환경도 고려해야 하느냐였다. 결국 상소심은 표본 검사한 수산물의 방사능 수치가 높지 않다고 해도 원전사고 이후 바다환경은 여전히 ‘잠재적 위해성’을 갖고 있는 만큼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번 판결은 주권 국가의 식품 위생에 대한 재량권을 폭넓게 인정한 것이다.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의 노력은 각별했다. 1심 패소 이후 전담부서를 신설하고, 통상 전문 변호사를 담당 과장으로 영입해 공격적인 대응에 나섰다. 상소심 3주 전부터 스위스 현지 숙소에서 실무진 20여 명은 재판 상황을 가정해 실전에 대비했다고 한다. 이들의 치열한 준비 덕에 우리는 1심이 뒤집히는 미라클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실 국제 외교·통상 전문가들은 2심이 열리기 전 한국의 승소 가능성을 아주 낮게 점쳤다. 일본산 수산물의 위험성에 관해 WTO가 요구하는 수준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전 세계가 대한민국의 패소를 장담했던 상황이어서 그런지 승소의 기쁨은 두 배다. 

      대한민국의 승소 소식이 전해진 직후 일본 아베 총리는 오는 6월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 정상회담 기간에 문재인 대통령과의 개별 회담을 추진하지 않는 쪽으로 검토하고 있다 고 언론을 이용해 밝혔다. 고려하지도 않고 있던 문제일뿐 아니라, 회담을 안하면 조용히 안하면 될 일인데, 굳이 문 대통령과의 회담을 안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모양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베의 말에는 회담을 할 수도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판단컨데, 이러한 성급한 발언은 WTO 후쿠시마 수산물 소송의 '역전패'가 영향을 미친 듯하다.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 사이의 정상회담은 작년 9월 뉴욕에서 개최된 뒤 열리지 않고 있다. 둘 사이 전화 회담도 이뤄지지 않았다. 아베 총리가 성사 가능성이 높아 보였던 오사카 한·일 정상회담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힌데는 이번 세계무역기구의 판정이 상당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이번달 중의원 보궐선거와 기초자치단체장 등을 뽑는 통일지방선거 후반전에 이어, 7월 참의원 선거를 승리해 개헌작업을 가속화한다는 계획이었지만 WTO 판정 패배라는 뜻밖의 복병을 만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간 갈등을 부추겨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을 한국 쪽에 돌리려는 아베 정권의 노림수도 읽힌다. 2010년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에서도 한·일 정상의 개별 회담은 열리지 않았다. 때문에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이번 WTO의 제소건은 일본이 한국을 가장 만만하게 봤다는 증거이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54개 나라가 수산물 등 일본산 식품에 대한 수입 규제를 하다가 이 중 31개 나라가 규제를 없앴다. 일본은 남은 23개 국 중 전략적으로 한국만 WTO에 제소했다. 한국에 승소한 뒤, 이를 토대로 나머지 22개 국을 압박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최종심 판결 이후 고노 다로 외무상은 일본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면서 계속해서 양국 협의를 통해 수입 금지 철폐를 요청하겠다고 받아주지 않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이번 패소로 인해 일본의 기존 전략에 차질은 불가피해졌다. 일각에서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이 계속 금지돼 한·일 관계 경색이 지속될 것이라는 우려도 한다. 그러나 안전해야 할 우리의 먹거리를 놓고 한·일관계 경색을 걱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번 결과로 인해 일본의 잠재적 위험이 내재된 수산물을 수입 금지하는 조처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남은 과제에서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우선 일본이 무역이나 어업협정으로 보복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또, 110만톤에 달하는 원전 오염수 방류계획에 대한 대처도 앞으로 해결해야 하는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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