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많은 인물들의 탄생과 성장 과정, 그리고 그 인물들의 인생 마지막을 그리는 이야기들로 꽉 차 있습니다. 오늘 저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한 인물을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로 사는 인생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구약 사사시대 말기에 등장하는 엘리제사장이라는 인물(사무엘상 1-4장)입니다. 엘리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영적암흑기였던 사사시대가 끝나고 이제 왕정시대가 이제 막 시작될 무렵, 그 사사시대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사사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벌였습니다(사무엘상 4장). 두 번에 걸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무참하게 패배했습니다. 일차 전투인 에벤에셀 전투에서 4천명이 죽었습니다. 이차 전투인 아벡 전투에서는 언약궤를 메고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3만 명이 죽고, 자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도 빼앗기는 패배를 당했습니다. 이 전쟁 패배의 소식이 전해진 그 날 엘리제사장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한 인생의 생의 마지막 장면을 들여다보면서 떠오르는 몇 가지 질문을 통해 깨닫는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믿음으로 살 것인가, 요행을 바라며(aleatory) 살 것인가?’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엘리제사장의 마음은 초조했습니다.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온 성읍이 부르짖는지라”(사무엘상4:13)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언약궤로 말미암아 떨고 있었습니다. 두 가지 마음이 그의 마음을 방망이질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언약궤를 사용해도 되는 것인가?’ 왜 그의 마음이 떨리고 있습니까? 언약궤를 오용하고 있는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엘리제사장은 불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궤를 내어 주었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장로들과 두 아들의 성화를 이기 못하고 마지못해 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두려웠습니다. ‘과연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엘리 제사장은 마음은 떨렸지만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을 것입니다. ‘뭐 어떻게 되겠지?’‘설마 하나님이 당신의 궤를 가지고 나갔는데 패하게 하시겠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요행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로또 복권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요행’을 바라며 인생을 살 가능성이 참 많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영혼을 잘되게 할 것인가? 육신을 잘 되게 할 것인가?’입니다. 성경 기록자는 전쟁 결과에 대한 소식을 접하는 엘리제사장의 모습을 묘사할 때 그의 신체에 관한 두 가지 모습을 언급합니다. 하나는“그때에 엘리의 나이가 구십팔 세라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사무엘상 4:14)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사무엘상 4:18)입니다. 자, 여기서 왜 기록자는 갑자기 엘리제사장의 신체적인 문제점을 언급할까요? 나이가 98팔세의 고령이어서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또 엘리제사장이 목이 부러져 죽은 이유를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 의자에서 자빠지기는 했지만 정작 목이 부러져 죽은 이유는 몸이 비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왜 사무엘서 기자는 엘리제사장의 신체적인 부분들을 거듭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요?

      정말 말하려고 하는 것이 그의 신체적인 부분들일까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체를 언급하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제사장의 영적인 무능력함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해 살지 않고 육신을 위해서만 살았다는 고발입니다. 엘리제사장이 왜 죽었다고요? 몸이 비대하여 목이 부러져 죽었답니다. 뭘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육신을 위해서만 살았구나?”라는 외침입니다. 자기 몸 하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세상적으로 비대한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중요한데,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깨어 있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범사가 잘 되고 영혼이 잘 되는 순서가 성경이 말하는 순서가 아닙니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 되는 순서(요한삼서 1:2)가 진정으로 잘 되는 순서입니다. 육신이 잘 되는 것만을 위해서 살지 마십시오. 영혼을 살찌우는 일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질문은, ‘시작만 좋게 할 것인가, 끝(마무리)을 좋게 할 것인가?’입니다. 엘리제사장이 죽은 때가 언제라고 말합니까? ‘사사가 된 지 40년’입니다. 아무나 사사가 되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는 사사가 되기 전에 믿음도 좋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적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가 되었고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시작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시작만 좋았습니다. 시작만 좋고 끝이 안 좋은 인생은 결코 성공한 인생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네 부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시작도 안 좋은데 끝도 안 좋은 인생’입니다. 두 번째는 ‘시작은 좋은데 끝이 안 좋은 인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시작은 안 좋았는데 끝이 좋은 인생’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인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인생인 것 같습니까? 어떤 인생일 것 같습니까? 적어도 두 가지 인생으로 우리 인생이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작은 안 좋았는데 끝이 좋은 인생’아니면,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인생’ 이런 인생으로 말입니다. 인생 마무리 잘해야 성공하는 인생이 됩니다. 인생 망가지는 거 한순간입니다.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까지,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고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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