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월이 되었다. 새해를 맞으며 각오를 단단히 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달력의 반이 훌렁 넘어갔다.  미국에서 가장 핫 한 휴가철인 독립기념일 주간도 지났다. 그동안 아이들과 함께 캠핑도 다녀왔고, 낚시도 한번 다녀왔으며, 물놀이도 짧게나마 다녀왔다. 이렇게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오랜만에 서재에 앉았는데 책상에 먼지가 하얗게 쌓였다. 책상 위에 걸려 있는 달력도 4월에 멈춰 있었다. 포커스에 중앙일보 일까지 겹치면서 최근 집안일에 소홀했던 표가 났다. 부랴부랴 한 장, 두 장을 넘기고 미리 한 장을 더 넘겨 8월에 맞춰놓았다. 그리고는 먼지 앉은 책상을 정리하다 우연히 이민 초기에 적었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일기장을 넘기면서 잠시나마 뒤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2002년 8월 1일 인내심의 한계’라고 적혀 있다. 이때는 개인 체크 북을 도둑맞고 며칠 후에 적은 일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집 우체통에서 체크를 훔쳐 간 사람이 5백 달러 정도를 사용했는데, 이를 돌려받기 위해 3개월이 걸렸다. 그 돈을 돌려받기 위해 거의 매일같이 은행을 찾아가 지점장에게 눈도장을 찍으면서 읍소를 했다. 은행 측에서 체크 아래의 서명이 도용된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환불에 대한 절차는 진척이 없었다. 우리 생각에는 금방 처리해 줘도 될 것 같은데, 굳이 본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차일피일 미루다 몇 달이 지나버린 것이다.  당시에는 학생이라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다 보니 그 5백 달러를 돌려받기 위해 기다렸던 3개월은 긴장되고 초조했던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이 경우는 은행에 가서 지점장의 얼굴을 직접 보면서 말을 할 수 있어 마음이 한결 수월했었다. 그날의 일기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일이라는 것이 말이 안 통하는 사람한테 더 많이 생기는 것 같다.”

      ‘2006년 5월 17일 미국에 사는 것 자체가 설움’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영주권을 스폰서 해 준 한국일보사로부터 해고를 당하기 직전이었다. 박봉임에도 불구하고 주말도 없이 뛰어다니면서 일했는데 결국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일을 그만두었다. 금방 해결될 것 같았던 체류신분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고, 가지고 있던 돈도 부족한 생활비로 채우느라 바닥이 난 상태였다. 그리고 영주권이 없다는 이유로 필자와 의견을 달리하는 단체장으로부터 조롱 섞인 협박도 받았었다. 멀쩡한 모국을 놔두고 다른 나라에서 영주권을 받겠다고 변호사비 내고, 이민국 수수료 내고, 세금도 몇 배로 내고, 아직 영주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구분되어졌던 현실이 참으로 한심스러웠던 것 같다.

     ‘2009년 7월 3일 기분 완전 나쁨’ 이라고 적혀 있다. 그날은 유독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날이었던 것 같다. 낮에 전화 회사와 수도국과 통화를 했던 내용이 일기장에 적혀있었다. 담당자와 전화 통화를 하기 위해 30여 분 동안 전화기를 들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서 화가 났었고, 전화기를 들고 있는 팔이 아파서 싫었고, 무엇보다도 통화 전부터 언어의 장벽을 미리 계산하고 있는 시간이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오랫동안 대기했다고 해서 수도국에서 편의를 봐줄 리가 없다. 30분을 기다렸지만 정작 통화는 3분 안에 끝났다. 자기들이 계산한 요금이 맞으니 무조건 내야 한다는 간단한 내용이다. 아니라고 바락바락 우겨도 봤지만 내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재검토할 생각조차 없는 것인지 무조건 돈부터 내란다. 착오가 있으면 나중에 크레딧을 준다고 했다. 한국에서처럼 직접 찾아가서 얼굴을 보면서 따지면 조금 나을 것도 같은데, 그러지 못해 무척이나 답답했다. 이민 초기에는 이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던 이민 초기에는 느릿느릿한 미국의 행정 절차 때문에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얼마 전 리커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는 지인을 찾아갔는데 그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보험료를 냈는데 안 냈다고 해서 화가 났다면서, 매번 왜 이런지 모르겠다며, 양껏 따지지 못한 것이 분했는지 말 통하는 한국을 그리워했다. 그는 바쁜 와중에 실랑이를 벌이면서 버리는 시간이 아까워 억울해도 연체료까지 낸 적도 있다고 했다. 이런 일이 자꾸 발생하면 답답한 마음을 넘어 서러운 생각까지 든다고 했다. 이민 와서 전화비, 전기세 몇 푼 더 낸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말 통하지 않는 이 곳에서 무시당하고 산다는 생각에 더욱 서럽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더 큰 상처도 많이 받는다. 돈 없이 이민 왔다고 가족 형제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동업자에게 사기당하고, 악덕 건축업자에게 선불로 준 돈 날리고, 학비가 없어서 학업을 중단하고 군 입대를 선택해야 했으며, 같은 동포라고 믿고 일했건만 불법체류자라고 멸시당하고, 신분을 해결하기 위해 위장 결혼까지 해야 했다. 여러 사람들은 불법체류자이니 이민국에 신고하겠다는 협박성 문자 메시지도 받은 적이 있다. 신분을 볼모 삼아 이민국에 신고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과 한 동네에서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우리 이민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미국 이민이었지만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필자와 그리고 우리 동포들의 이야기들이다. 그 세월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들었을까 가히 짐작해본다. 그러나 마치 족쇄처럼 옭아매어져 있던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자식들은 나같은 힘든 세월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일했다. 밤새 하는 청소일이나 남의 집 허드렛 일도, 쓰레기 줍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들 중 대부분이 이웃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민 초기에 불만으로 가득 찼던 나의 일기장도 어느 새 감동의 순간들로 하나둘씩 채워지고 있다. 돌이켜보면 이민생활에서 주어진 고생도 우리가 선택한 길이기에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다.

      비지니스도, 사람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주부터 콜로라도의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다. 메마른 사막에도 오아시스는 있다. 내 인생의 오아시스를 찾기 위해 하루 아니 반나절이라도 시름을 내려놓고 힐링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다. 고생스럽게 쓴맛을 맛보고 나면 즐거움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귀찮고 힘들어도 시간이 흐르면 이 또한 귀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 번의 실수로 많은 것을 잃더라도 그 과오에 대한 ‘깨달음’이 인생의 재산으로 남는 것처럼 말이다. 한 해를 중간 점검해야 할 때다. 남은 반년에 대한 계획을 다시 세워봐도 좋을 듯하다. 그래서 올해 마지막 날 쓰는 일기장에는 우리 모두 고통과 시련을 이겨낸 주인공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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