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 전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그 건널목을 건너는 한 여성을 보았습니다. 유모차위에 우산까지 따로 펴 덮고 있어서 ‘아기를 참 사랑하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 여인이 차 앞으로 지나가는 동안 그 유모차 안에 개가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슬퍼진 적이 있습니다. 나도 개를 키워보고 땅에 묻은 적도 있고, 그 이별이 싫어서 더 이상 키우지 않지만, ‘저렇게까지 해야 되냐?’ 반문하는 저에게 옆에 앉은 아내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저 사람은 개 때문에 사는 거야, 말하자면 저게 저 사람들의 목숨 줄이지...’ 하긴 우리 주위에 개 사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돈끼리 만나면 서로 개 안부를 물어보며 자랑입니다. ‘자랑할 자식들이 없어서 개 자랑일까? 아니면 자식들 사랑만으로는 사랑이 남아나기에 개까지 자랑하는 걸까?’ 대부분 사랑이 넘치는 분들이지만, 그래도 때때로 슬퍼 보일 때가 있습니다.

      70년대, 나는 명동의 카페떼아뜨르에서 고 추송웅 씨의 모노드라마 ‘피터의 고백’에 빠져 살았습니다. 비가 오면 차 한잔에, 눈이 오면 술 한잔에 취해서 돌아가는 명동 나그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위대열에 휩싸여 본의 아니게 명동성당에 들어갔습니다. 최류탄에 쫓기는 젊은이들끼리 최소한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밀려들어 간 성당이었는데, 그때 신부님께서 명동성당 신축기금 강론을 하고 계셨습니다.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피할 수 없는 헌금 이야기였지만, 그때 나는 경제적으로도 신부님의 사정을 받아들일 만큼 여유가 없었습니다. 다시 최류탄이 가득한 명동거리로 나서면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해. 더 이상 내 탓이요 라고 말하면 안돼!’ 그 이후 나는 명동성당 쪽에 있는 생맥주집에도 더 이상 가지 않았습니다.

      스물세 살, 조국을 지킨다는 일념으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안 가도 되는 군대에 뛰어들었습니다. 6,25 전쟁의 폭음 속에 태어난 탓에 오른쪽 귀 고막이 상해 안 가도 되는 것을 청각검사에서 삐-소리가 들리면 왼손을 들고 안 들리면 오른손을 들어 다 들리는 것처럼 위장하고 합격한 대한민국 육군 이병입니다. 그 일념이 보였든지 대대장이 저를 따가리(Office비서)로 스카웃하며 1급 비밀 취급 라이선스가 나오고 졸지에 병장으로 승진하여 그때부터 장교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신빠리 소위가 군기가 충만하여 소대장으로 부임을 하고 당연히 나와 충돌했지요. 장교를 오히려 군기 잡겠다고 설쳐대던 나는 상관모욕죄로 헌병대에 끌려가고 사단 징창(영창보다는 가벼운)에 들어갔습니다. 병장 계급장 떼고 이름표 떼고 창살 안에 들어가 앉으니 따가리의 자존심도 상하고 참 슬펐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말라...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면 그리움이 되리니...’ 그때 외운 푸시킨의 시입니다.

      그때 잘 알고 지낸 헌병대장 따가리가 성경을 넣어줬지만, 옆에다 밀쳐버리고 분노의 날을 보냈습니다. 행여라도 펼쳐본 성경에서 ‘사랑 같은 걸’하라고 할까봐 지례 반발했던 것이지요. 사랑이란, 그건 좀 먹고사는 인간들이 뭐 또 좋은 일 없을까 하고 어슬렁거릴 때나 하는 일 같았습니다. 거리에서, 노동현장에서, 여공들이 머리채 잡혀 끌려가고, 노동자들이 분신하고, 학교에서 친구들이 끌려가 고문당하는 시절에 사랑이라니... 이 구체적인 폭력을 용서하라니... 그렇게 바보 같고 물렁하고 패배적인게 종교라니... 로마의 식민지로 짓밟히는 유대 민중에게‘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친 예수를 배신한 가롯유다 쪽이 훨씬 더 제 심성에 맞,았,었,습니다.

      폐일언하고, 뒤늦게 목사가 되어 미국에 온 나는 ‘모든 게 내 탓이요’라고 무릎 꿇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낯설고 반항하던 그 창살 속에 제 스스로를 가둔 것이지요. 그러나 가둠으로써 가장 큰 것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비로소 내가 누군지를 알고 나를 회복하고 보니 얼마나 가볍고 자유하고 치열한 삶이 어찌 그리 행복한지요. 할 수 있는 일 때문에 감사하고, 주님의 일을 하니 더욱 감사하고, 섬김의 하루하루가 ‘환희’자체입니다. 물질의 쾌락, 문명의 극치를 누리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가두고 사는 우리의 내면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냥 사람이 싫고 세상이 싫어서? 아니요, 결과를 알기에 스스로 갇힌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미 깃들어 있는 신성(神性)의 열망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제는 슬퍼도 살고 슬퍼서 더욱 삽니다.

       지금 지구 산소의 20%를 생성하며 온실가스의 주범이라는 하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역할을 하기에 ‘지구의 폐’라고 하는 아마존이 불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쓰는 화장실 휴지까지도 다 아마존의 정글을 벌목해서 나온 것입니다. 브라질은 새로운 경작지를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다국적 기업들은 세계 경제를 책임진다는 슬로건 아래 모든 문명의 이기를 아마존에서 절제 없이 파먹고 살다가 결국 온 밀림이 불타는 재앙을 맞게 되었습니다. 4주째 불타고 있는 아마존을 새들라이트가 우주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전 남미가 불바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2-13) 우리가 삶의 의미에 무관심할수록 생활 수단에 탐욕스러워집니다. 알아야 합니다. ‘문명화라는 것이 결국 인간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냉혹한 전쟁’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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