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우연한 기회에 등산을 하게 되었는데, 산길을 따라 펼쳐지는 광경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환호하기에 차고 넘치는 풍경이었습니다. 산세가 깊어질 수록 멋진 풍경에 심신이 새롭게 됨이 하나님께 너무나도 감사한 시간이었지요. 이런 아름다운 장관, 사진을 찍다가 혼자 보기에 아까워 가까운 지인에게 전화를 걸려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그널을 체크하는 안테나 표시가 한 개도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있던 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혹시나 신호가 잡힐까 전화기를 하늘로 들어보았지만, 전혀 되지 않더군요. “전화기 회사를 바꿔야 하나?”라며 여러 번 다시 시도하다가, 결국 사진만 남기고 산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하산하는 중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휴대폰에서“띠리링”하며 통신이 가능함을 알리었고, 동시에 온갖 메일과 문자등 알림이 한동안 울렸습니다. “X톡, X톡, X톡, X톡…” “목사님 연락이 안 되네요? 문자 확인하시면 빠른 회신 부탁드립니다”등 중요한 알림이 많더군요. 그 중에는 시간을 다투는 급한 용무가 포함된 이메일도 있었습니다. “아… 그 통신사를 사용했더라면 이런 알림 등을 놓치지 않았을까?”라며 나름 불평 아닌 불평을 하던 중, 20여 년 전에 본 영화가 생각이 났습니다. 1997년에 개봉된 영화 ‘접속’입니다.

      영화에서는 사랑의 아픔을 가진 주인공이 PC 통신을 통해 알고 만나게 되는 과정을 애절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데,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때 관객들은 안타까워하지요. 당시 한석규와 전도연이 주연을 맡았는데, 지금에 생각해보면 만일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지금 시대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안타까움은 ‘휴대폰’의 유무에 있다는 것. 영화 속에 등장한 요즘 세상에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 중의 하나가 돼 버린 공중전화의 모습들. 퇴근 시간이 되면 공중전화 앞에 늘어서서 전화를 기다리고, 바쁘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전화를 걸어야 했던 추억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손안에 컴퓨터라 하여 스마트폰으로 많은 일들을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메일, 지도, 경로검색, 웹서핑, 은행업무, 서류작성 등 컴퓨터로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을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면 가능합니다. 몇 주 지난 드라마, 뉴스 등을 보기 위하여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테잎을 빌려보던 시절이 불과 엊그제 같다며, 휴대폰으로 바로 몇 시간 전에 방영된 드라마를 시청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편히 누리고 살아감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한이 없을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이전 세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참 고마운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참 신기하게도, 그 고마운 것에 대하여 쉽게 익숙해집니다. ‘익숙함’이 ‘당연함’으로 여겨지는 순간 그것에 대한 ‘고마움’이 사라집니다. 고마움이 사라지면 더 채워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불평’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감사’를 잃어버린 마음에는‘불평과 불만’이라는 놈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감사’가 많으신지요? 아니면 ‘불평과 불만’이 많으신지요? 다음 주면 ThanksGiving Day, 그리고 미국에 있는 교회에서는 오는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한해를 되돌아보며,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되짚어 보며 감사를 드리는 것이지요. 2019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며, 헬렌켈러의 책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헬렌 켈러가 어느 날 숲속을 다녀온 친구에게 물었다지요.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 친구는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말했답니다. 헬렌 켈러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두 눈 뜨고도 두 귀 열고도 별로 특별히 본 것도 들은 것도 없고, 할 말조차 없다니요. 그래서 비록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였지만, 그녀는 스스로 만약, 자신이 단 사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어떤 것을 보고 느낄 것인지 미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 (Three days to see)' 이란 제목으로, '애틀랜틱 먼스리' 1933년 1월 호에 발표했습니다.

      3일 동안에 헬렌켈러가 하고자 하는 일들은 참으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해가 뜨는 것과 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 길가에 핀 꽃과 풀잎, 그리고 나뭇잎을 바라보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물건들을 구경하는 일. 그리고 하늘에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는 일. 무척이나 단조로운 일이지요? 헬렌켈러가 그토록 보고자 소망했던 일들은 어쩌면 우리가 날마다 일상 속에서 특별한 대가없이도 보고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는 모르지요. 오히려 당연한 일인 것처럼 누리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감사를 물질적인 조건이 채워질 때 감사하다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느끼는 많은 감정, 특히 감사, 행복, 고마움 같은 것은 현재 누리는 물질적인 조건이나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느냐가 아닐까요? 내가 무엇을 누리는가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 마음에서부터 감사한 일들이 생기리라 믿습니다. 잃어버린 마음 ‘감사’! 오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 보시는 것을 어떨까요? 우선 저부터! “부족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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