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생명력 있는 예배가 되면 교회가 살아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예배를 회복시킬 것인가를 고민을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은 예배가 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살아있는 예배가 될 수 있게 할 것인가? 즉 예배가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요4;24-26) 그래서 신령과 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자의 자세는 언제나 하나님의 닮은 삶 즉 내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해져서 드리는 예배 또는 내가 경건하니 나와 같은 형상으로 회복되어 드려지는 예배자의 자세라고 말할 수 있다.

드려지는 예배에는 얻고자 하는 욕구보다 드리고자 하는 것이 강해야 한다. 예배에는 받고자 하는 것보다 섬기고자 하는 것이 강하게 작용되어야 한다. 앞서서 언급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내어 주셨고 먼저 우리를 섬겨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여 주셨고 자녀되게 하셨기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경외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이야 한다.

은혜 받기를 원하고, 말씀으로 위로 받기를 원하며, 복을 받기를 원하고, 문제의 해결함 받기를 원하고, 병 고침 받기를 원하는, 예배의 중심이 “받고자 하는 욕구”로 가득 차 있다. 어쩌면 이러한 예배 경향은 기복주의 신앙형태를 양산하는 배양토가 되었다.

물론 예배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축복 주시기를 원하시고,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이미 이것은 주었으나 다만 우리들이 믿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믿음을 기초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예배의 핵심이며, 독생자를 내어 주신 은혜와 구속사건 앞에 감격하여 자신의 전부를 드리려는 것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자들은 받으려는 자신의 욕망을 앞세워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라 은혜와 구속의 은총 앞에서 자신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아니 생애 전부를 드리려는 산제물의 자세를 가지고 예배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죄인된 사람의 문화와 삶의 양식들은 그 목표를 즐거움의 추구(entertainment)에 두고 있다. 그래서 이벤트식을 좋아한다. 다시말하면 show business 형태이며,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즐거움’(entertainment)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배의 무너짐에 따라 예배 속에 나타나는 가장 유혹적인 것은 웃음과 즐거움이다. 성도들의 욕구와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채널의 변화를 교회가 받아 들이고 있고 설교자가 이것을 응용하여 효과의 측면(effectiveness)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꿀송이 보다 달며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고 하였다. 물론 예배의 신학적 측면에서 볼 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도 성육신하여 이 땅에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성신전원교회 김교철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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