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스승이 계십니다>
     논어에 “세 사람이 길을 같이 걸어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살펴 스스로 고쳐야 한다[三人行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염두에 둔다면 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방영되는 TV프로그램 중에‘힐링 캠프’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유명한 스타나 인사들을 초청하여 이들의 진심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면서 참가자들의 힘든 삶을 위로하고 힐링해 보려는 그런 프로그램입니다. 제가 본 내용은 스승의 날 특집이었는데 그 프로그램의 공동사회자인 세 사람이 각자에게 기억나는 스승을 모시고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사회자 중에 가장 연장자이며 메인 진행자인 이경규 씨가 모셔온 스승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이경규 씨가 초청한 스승은 뜻밖에 그의 상당한 후배인 개그맨 이윤석 씨였습니다.

     다른 진행자가 잘 알려진 고승이나 선배연기자를 초청한 것에 비해 상당히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후배를 스승으로 초청한 이경규 씨는 후배를 스승으로 모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1) 지난날을 돌아보면 중요한 것을 선택할 때마다 문제를 이 친구에게 얘기했고 그때 준 의견은 늘 도움이 되었다. 2)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지 이 친구는 충고나 조언의 말보다는 나를 지지해 주는 말로 힘이 되었다 3) 내가 누군가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을 때 이 친구는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옮기지 않았다 4) 내가 많이 힘들 때 누구에게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이 친구 앞에서는 울었던 적이 있었다. 5) 연예대상을 받았는데 딱히 찾아갈 사람이 없어서 이 친구를 찾았다 6) 화려하지도 않고 성공한 연예인은 아닌 것 같지만 이 친구는 딴짓을 하지 않고 오직 한길만 걸었다 7) 녹화 후 항상 나에게 “고생하셨습니다”라고 감사의 문자를 보낸다.

      이 말을 듣고 참 많이 놀랐습니다. 연예대상을 받을 만큼 이제 최고의 자리에 선 사람이 남들이 눈길을 끌지 못하는 한 후배를 스승으로 여기며 그 이유를 설명할 때 TV에 비친 일반적인 이 사람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일면을 보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작은 후배에게서도 배우려고 하는 그의 겸손함이 오늘의 그를 최고의 자리로 이끌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스승이 돼서 가르치려고만 하고 듣지 않으려는 이 세대에 주시는 말씀-“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2:3) 내가 가르칠 자가 아니라 배울 자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정말 걱정해야 할 일>
      옛날 어떤 집에 딸이 셋이 있었는데 하나는 너무 게을러서 시집을 못 가고, 둘째는 도벽이 있어서 시집을 못 가고, 셋째는 말끝마다 불평불만이 많아서 시집을 못 가는 노처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건넛 마을 어느 부자 영감이 그 집의 소식을 듣고는, 마침 자기 집에 아들 셋이 있었는데 한꺼번에 며느리를 삼을 테니까 사돈을 맺자고 청혼을 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더 볼 것도 없이 다 한꺼번에 출가를 시켰습니다. 세 며느리를 한꺼번에 맞아들인 부자 영감은, 우선 첫째 며느리에게는 몸종을 많이 주어 실컷 게으름을 피우게 만들고 아침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자게 했습니다. 그다음 둘째 며느리에게는 그 집 창고 열쇠를 모두 맡기고 맘대로 물건도 갖고 돈도 쓰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며느리에게는 영감이 매일 찾아가 그 며느리로 하여금 마음껏 남의 흉을 보고 불평하도록 말을 들어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친정 아버지는 궁금해졌습니다. <딸들이 시집가서 과연 잘 살고 있을까? 집에서는 엉망이었는데...> 그래서 하루는 사돈집을 직접 방문했습니다. 먼저 첫째 딸을 찾아가서 <어떻게 사느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게으름뱅이였던 큰딸은 몸종을 많이 두고 게으름을 부릴 만큼 부리면서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다음 둘째 딸을 찾아가서 <어떻게 사느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도벽이 심했던 딸은 자신이 창고 열쇠를 가지고 있어서 도둑질 할 필요가 없고 아주 만족하게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딸을 찾아가 <어떻게 사느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셋째 딸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이고 아버지, 매일 같이 시아버지가 와서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시아버지 보기 싫어서 못 살겠어요> 셋째 딸의 말을 듣고는 그 친정 아버지는 이렇게 탄식을 했습니다. <아, 게으름뱅이도, 도벽있는 딸도 다 고쳐서 행복하게 사는데 저 원망하는 딸 만은 계속 불행하구나!> 원망과 불평의 그늘에서는 행복이라는 꽃이 절대로 필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화인 듯 싶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과 모세를 향한 원망과 불평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려는 사람보다 사랑받으려는 사람이 많이 모인 공동체일수록 그런 소리가 더하겠죠. 무엇인가를 받으려고만 하면 늘 부족함에 원망과 불평이 흘러나오지만 주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미안함과 겸손함의 향기가 흘러나오곤 합니다. 가끔 귓전에 “왜 나에게 신경 안 써 주냐, 왜 안 알아주냐”하는 말이 들리곤 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옛 성현의 소리를 한번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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