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우한으로부터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이 온 세상을 집어 삼킬 듯 퍼져 나가고 있다. 급기야 WHO(세계 보건기구)가‘팬데믹’(pandemic, 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고,  미국 대통령도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사람들 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 신앙적인 대 혼란을 격고 있는 것 같다. 주식 시장이 요동치고, 마켓마다 사재기가 판을 치고 있다. 주정부는 비즈니스 문을 닫으라고 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한 마디로 너무도 당연했던 일상을 송두리째 빼앗길 판이다. 일상이 사라져 간다.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다. 만나도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경계부터 해야 한다. 사람 기피증 환자가 넘쳐날 판이다. 생전 들어보지도 않았고 마땅한 치료제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물에 불과한 바이러스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의 짙은 먹구름이 우리들의 일상을 소리 없이 점령하고 있다.

     어쩌면 가장 큰 바이러스는 사스도 메르스도 코로나도 아닌 우리들의 마음속에 주리를 틀고 들어와 앉아 있는 공포와 절망의 바이러스가 아닐까 싶다. 이 과도한 두려움과 공포의 바이러스는 잘못된 정보로 인한 각종 사회적 부작용들을 만들어 낸다. 소위 ‘인포데믹스’(Infodemics)가 확산되는 것이다. ‘인포데믹스’는 ‘정보’(Information)와 ‘전염병’(Epidemics)의 합성어로서 ‘정보 전염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인포페믹스를 ‘21세기 흑사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유럽 중세시대(14세기)에 전 유럽을 휩쓸었던 이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적게는 7,500만에서 많게는 2억 명이었다는 통계가 있다. 그런데 실제로 페스트균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수보다 이 ‘인포데믹스’ 곧, 정보 전염병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참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목사인 저도 지난주 토요일(14일)에, 한인들이 자주 찾는 오로라 지역 한인 마켓과 식당에 확진자가 나왔다는 확인되지 않은 잘못된 정보로 인해 주일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며 헛소문에 놀아난 하루를 보내면서 이 ‘인포데믹스’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경험했다. 어제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경기도 성남에 있는 한 교회가 집단 감염의 발원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 집단 감염의 원인이 어처구니없게도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의 입과 손을 소독하기 위해 분무기로 소금물을 뿌린 것이 원인이란다. 더 어이가 없는 일은 이 분무기를 사용한 사람이 그 교회 담임목사 사모란다. 이 사모는 이미 자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도 모른 채 성도들 입에 소금물을 분무한 것이다. 소금물을 분무한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를 분사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정보들은 어디서 획득된 정보들일까? 아마도 무분별하게 확인도 되지 않은 정보들을 퍼 나르는 SNS나 유튜브 등을 통해 얻게 된 어설프기 그지없는 정보들일 것이다. 한 마디로 ‘정보 전염병’이 불러온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교회들마다 주일예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한다. 정부 당국자들은 예배를 포함해서 교인들이 집단으로 모이는 모임을 중단해 달라고 권고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떤 위기와 두려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찬의 정체성인 예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나와 우리 교회로 인해 바이러스가 다른 사람들에게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잠시 예배 장소와 형식을 바꿔도 되지 않느냐는 두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무엇이 중요할까? 하나님 사람과 이웃 사랑 중에 어디에 무게를 두고 행동해야 할까? 이럴 때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봐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사랑이 곧 이웃 사랑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둘을 결코 구분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안식일 법을 어기시면서까지 병자들을 고치시지 않았는가?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지 않는다고 예배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예배드리는 장소와 형식을 잠시 바꾸었을 뿐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예배 신학에 대한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나와 다른 주장을 하는 지체들을 정죄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렇게 하는 나는 믿음이 좋고 그렇게 하지 않는 너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흑백논리적인 사고는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종교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들을 양산할 뿐이다. 이 극한 상황 속에서 지금은 우리 모두가 ‘이웃 사랑’에 무게를 두고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품격을 보여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하이페밀리 대표인 송길원 목사는 ‘코로나바이러스가 가져다 준 선물’이라는 글에서 “서로를 향한 불신과 배척,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길 수 있으려면 ‘배려와 존중’이 빛을 발해야 한다. 나는 한걸음에 역병이 창궐한 대구로 내려간 간호(천사)사들을 바라보며 위기에서 ‘사람의 인격’이 드러나고 극한 상황에서 ‘도시의 품격’이 확인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전대미문의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이 위기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바이러스보다 더한 공포로 나가오는 ‘인포데믹스’를 퇴치하는 비결이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던져 보면서 지난 주간에 한국 국민일보 ‘겨자씨’에 실렸던 글을 공유하며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자신을 메뚜기라고 여기는 사람 (민 13:33)에게 1㎝의 상처는 치명적입니다. 그러나 코끼리에게는 모기에 물린 정도입니다. 간장 종지에 담긴 소금물은 짜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양의 소금을 강물에 뿌리면 맹물 맛입니다. 소금을 ‘고난’이라 한다면, 문제는 소금의 양이 아니라 그릇의 크기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없애 주시기도 하지만, 우리의 그릇을 고난보다 크게 하셔서 이기게도 하십니다. 면역력 강한 사람이 병균을 이기듯이, 고난을 이기는 법은 코끼리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코끼리만큼 커지는 법은 만유보다 크신 예수님께 늘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힘이 내 힘이 되고 예수님 권세가 내 권세가 돼 고난을 이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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