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추수감사절부터 사실상 연말연시를 준비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가장 큰 일은 단연 먹는 것이다. 때문에 장을 보는 횟수가 늘어난다. 지난주에도 어김없이 한인 마켓에 장을 보러 갔다. 오로라 타운 내에 있는 한인 마켓들은 요즘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을 전후로 한인 마켓에는 월 마트가 안 부러울 정도로 많은 외국 사람들이 찾아와 장을 보았다. 이렇게 고객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 손님이다 보니 같은 소비자이지만 한인이라는 이유로 신경 쓰이는 일들이 더러 있다. 한번은 밑반찬 코너에서 서성이는 중국 사람이 깻잎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나름 열심히 설명을 해 줬지만 확실하게 이해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고추장이나 된장, 쌈장에 대해서도 물어보는 이들이 종종 있다. 그때마다 나는 스스로 한국음식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잘못된 설명으로 인해 한국 밑반찬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마켓에서 외국인 손님을 마주할 때마다 약간의 주인의식이 생기는 것은 이 곳의 잘나가는 아시안 마트의 경영주가 한국인이라는데 그 이유가 있다. 그래서 마트 내에서 쇼핑을 하고 있는 외국인들을 보면 한국의 배가 미국의 배보다 훨씬 달고 맛있다, 한국 아이스크림이 미국의 그것보다 달지 않고 부드럽다, 한국의 라면이야말로 일본, 중국 라면 맛과 비교할 수 없다면서 적극 추천하고 싶어진다. 실제로 라면과 뻥튀기 과자를 추천해 준일도 있다. 이렇게 일일이 우리의 음식을 자랑하고 싶은 것 또한 일종의 주인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통로 가운데 쇼핑 카트를 두고 다른 사람의 통행을 방해하는 아저씨, 이것저것 뒤적거리는 아줌마들, 특히 상자 단위로 판매되는 과일을 구매하면서 이 박스 저 박스 뒤져가면서 알맹이 큰 것들만 골라 자신의 박스에 챙겨 넣는 우리의 아줌마들을 볼 때면 아직도 마켓에서의 쇼핑 예절을 익히지 못한 것 같아 민망할 때가 있다.

  지난주 한 마켓에 잠시 들렀다. 몇 가지를 간단히 사고 계산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여자 아이를 태운 카트가 캐시어 라인 입구에 서 있었다. 하지만 부모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인 없는 카트 뒤에는 베트남인 부부가 서 있었다. 그 부부의 대화 내용을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표정으로 봐서는 불만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계산대는 비어져 있고, 한참 지났지만 앞의 카트 주인이 나타나질 않자 뒤 사람의 동의에 힘입어 베트남 부부가 자신의 카트를 앞으로 들여놓으려고 했다. 그때 마침 그 여자 아이의 아버지가 라면 한 박스를 들고 뛰어왔다. 그리고는 마치 그 계산대를 전세라도 낸 듯이 당당하게 자신의 물건들을 계산대에 올리기 시작했다. 거의 계산이 끝났을 무렵, 그 아버지는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돈을 내야 할 때 어디선가 그의 아내가 무와 간장병을 들고 뛰어와 계산대에 올려놓고 남편에게 합세했다. 설마 한국인일까. 그랬다. 한인이었다. 그들 뒤에 서 있는 베트남 부부와 흑인 아줌마, 그리고 옆 줄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필자, 우린 어느새 국적과 인종을 뛰어 넘어 한 마음이 된 것 같았다. 갑자기 나는 한인이 아닌 척을 하고 싶어졌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들을 뒤로 한 채 유유히 계산을 끝내고 나가는 이들이야말로 개선장군의 기세가 부럽지 않은 듯 했다. 한마디로 염치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온 것일까. 내가 잘 아는 곳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마음에서 비롯됐을까. 아니면 한국 사람이 사장이니까 본인도 같은 서열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무조건 내가 먼저라는 무대포 정신에서 시작되었을까. 차라리“I am sorry” 라고 말하면서 미안한 표정이라도 지어 보였다면 이리도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국적 사람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이토록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쇼핑에 대한 예절 개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예절이란 배어 있는 향기와 같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한다. 예부터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 사람의 인사예절을 보면 된다고 했다. 미안한 일을 저질렀으면‘미안하다’잘못된 일이 있으면 ‘잘못됐다’ 라고 인정하는 인사의 예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한인 마트에서 만난 한인들은 친절하고 상냥하다’는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인사라는 단어는 ‘사람 인(人)’과‘일 사(事)’자가 결합된 말로 ‘사람이 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사는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다. 편안히 맞아주는 인사와 정감어린 인사말, 깍듯한 사과는 맹자왈 공자왈 하는 글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심성에서 우러나야 한다.
  그 날 한인의 이미지를‘오만방자’로 만들어 놓은 그 부부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안하무인 격인 행동으로 인해 한인 전체의 이미지가 전락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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