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숙 기자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항상 신문이 배달되었다. 매일 신문을 읽는 아버지 어깨 너머로 어려운 한자들은 제쳐두고 읽을 수 있는 커다란 헤드라인이나 광고에 눈길이 가곤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식들도 다 커서 출가한 이후로 신문은 더 이상 배달되지 않았고 나는 궁금한 기사들을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이용해 접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매 기사마다 따라오는, 전에는 접해보지 못한 많은 댓글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댓글들을 마주하면서 전에 일간신문을 읽을 때와는 달리 필요한 기사들만 검색해서 보게 되었다.

  댓글을 읽다보면 필요 이상의 욕설들에 기분이 상하는 일이 많다. 신종플루로 자식을 잃은 연예인에게 차마 지면으로 옮기기도 민망한 악플을 달고 ‘아빠 나 여기 있어. 왜 날찾아. 나 안죽었어 아빠..’라며 개념없는 장난글을 써놓았다. 심지어 ‘쌤통이다’라고 쓴 악플러도 있다. 이처럼 인터넷을 통해 기사를 검색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눈살을 찌푸리는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최근 병역비리에 대한 재수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연기자에 대해서도 ‘정신병자 연예인’이란 말을 서슴없이 쓴다. 우울증이나 반사회적인 행동들이‘정신병’의 분류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쓰여지는 말이라면  습관적인 악플러에게도 또한 ‘정신병자’라는 말을 써야하지 않을까? 그들은 자신들에게 붙여지는 이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검찰의 자세한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정신병자’ 운운하는 것은 성급한 감이 있다.

최근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연예인들의 마약 사건을 접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김성민씨의 트위터에 응원글을 단 두 연예인에 대한 비난 또한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공인으로서 마약 복용 혐의을 두둔하는 것 처럼 보일 수 있고, 그것에 대한 충고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거기 올라온 글만 가지고 마약행위를 두둔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약간의 무리수가 있다.

  전에 공지영 장편 소설‘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은 적이 있다. 후에 영화로 제작되어 영화도 보았다. 책을 먼저 읽었기에 영화를 보면서 많은 아쉬움이 들었다. 책을 읽어보면 남녀 주인공의 지나온 삶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현재의 주인공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런 부분들이 영화에서 조금 밖에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웠다. 재판의 결과만 놓고 보면 그는 끔찍하고 파렴치한 살인범이지만 그의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된다.

  우리는 살면서 단 한번의 실수를 한 사람에게 아주 냉정할 때가 있다. 반대로 살면서 백만번 천만번도 더 용서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자신’이다.  성경에는‘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있다.  인간의 특성을 꿰뚫는 말씀이다. 나 자신에게 베푸는 이해와 자비의 시선을 조금만 더 타인에게 베풀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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