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불필요한 과정이 요구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물론 귀찮고 싫다. 그러면서 ‘이런 과정이 없어도 잘할 수 있는데…’ 하는 잘난 척과 함께 오만에 빠지곤 한다.
처음 패러글라이딩을 시작했을 때였다. 내 소유의 캐누피와 하네스가 없어서 선배들 것을 눈치껏 빌려서 연습을 했다. 동호회만 가입하면 바로 멋지게 하늘을 날 것이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지만 비행을 시작하기까지는 멀고도 험난했다. 패러글라이딩 동호회장을 우린‘대장’이라고 불렀다. 마치 군대내의 서열처럼 대장의 말에는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이들 세계의 법이었다. 그런 하늘같은 대장은 필자에게 비행 전 6개월간의 지상훈련을 명했다. 패러글라이딩을 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달리기 연습’도 1개월이 지나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펴진 캐누피를 다시 개고, 하네스에 연결될 조종 선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선배들의 일부터 도왔다. 이 모든 과정은 다음 비행을 더 빨리, 보다 안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웬만큼 손에 익자 지상에서 캐누피를 하늘에 띄우는 연습에 돌입했다. 바람을 등지고 하네스에 체중을 의지하며 캐누피를 띄워 공중에서 방향을 바꾸는 연습을 수 없이 했다. 매번 손가락이 짓무를 정도로 아프고, 어깨에 힘이 빠졌다. 비행 일정이 잡혀있는 주말마다‘오늘은 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지만 이륙장은 구경도 못했고, 착륙장에 내리는 선배들에게 물만 건네주고 돌아왔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지상훈련을 틈틈이 했는데, 그때마다 오늘만 연습하면 “다음 비행에 합류해라”는 대장의 명령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대장의 말대로 6개월이 지나서야 필자는 선배들 대열 꽁무니에 낄 수 있었다. 감격스런 첫 비행을 마치고 난 뒤 깨달았다. 그 동안 힘들었던 시간이야말로 비행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말이다.
첫째 아이를 낳을 때가 기억난다. 많은 산모들이 순산하듯이 나도 별 탈 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랐다. 양수가 터지고도 하루가 지났지만 아이가 나올 생각을 않자 병원 측에서는 결국 수술을 결정했다. 아이도 그렇지만 산모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산모 체온이 104도가 넘자 산소호흡기를 가지고 왔다. 어떻게 수술실까지 갔는지도 가물가물하고, 아이의 얼굴도 보여준 듯 한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힘들게 아이를 낳은 탓인지 한동안 정신적 안정을 찾지 못했다. 둘째 아이를 낳을 때는 더 힘들었다. 임신 5개월부터 조산기 때문에 수술을 했고, 임신 내내 주의를 요했다.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수술실을 나오자마자 과다 출혈로 응급상황이 벌어졌고, 10여명이 넘는 의사들이 병실에 모여 경과를 지켜봤다. 남편은 갓나온 둘째 아이를 안고 출입금지 된 병실 밖에서 발만 동동 굴렸다.
결혼전 필자는 ‘능력 있으면 혼자 살아도 좋다, 무자식이 상팔자’ 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 자체가 성공하는 여성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과 아픔의 과정을 겪으면서 얻은 두 아이는, 이 세상의 모든 엄마가 그러하듯, 나의 보물 1호들이다.
얼마 전 검찰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박해춘씨 살인사건과 관련한 증인으로 출두해 달라는 소환장이었다. 지난해 한창 박씨 실종사건에 대해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을 때에도 담당 형사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필자는 내가 말하는 조사 하나라도 빠짐없이 기록하기 위해 애쓰는 형사를 보면서 사안의 중요성을 깨닫는 동시에, 너무 자잘한 것까지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깍듯하게 예의를 다하는 형사와의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그 뒤 검찰 측은 이중희씨와의 전화 인터뷰를 보도한 본지의 기사내용에 대해 궁금해 했고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증인으로 참석하기를 원했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재판 당일에 일찍 코트 룸에 가야 하고, 계속 연기되는 재판 일정 때문에 여간 번거롭지 않았다. 모든 스케줄이 계속 이 재판에 얽매여 있다는 생각에 불편했다. 이런 와중에 이중희씨 변호사 또한 필자를 증인으로 참석하기를 요청하고 나섰다. 자기가 대변하는 이씨와 통화한 것 밖에 없는 필자를 자기 측의 증인으로 원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들이 불필요한 요청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솔직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귀찮을 것 같았으면 차라리 사건을 다루지 말 것을’이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하지만 이것은 필자의 직업을 망각하는 자세이기에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사건을 종결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이 귀찮은 증인요청도, 이 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족들의 고통의 시간도, 지루한 재판 절차도 이번 재판에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이 일의 가치는 재판이 끝난 후에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다. 고생스럽게 쓴 맛을 맛보고 나면 즐거움이 찾아온 다는 뜻이다. 그래서 귀찮고 힘들어도 나중에 이 일이 나의 또 다른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 믿는다. 한번의 실수로 재산을 모두 잃었더라도 그 과오에 대한‘깨달음’이 인생의 또다른 재산으로 남는 것처럼 말이다. <편집국장 김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