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프교회 정대성 담임목사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미디어 금식을 선포한다. (금식이란 말이 좀 이상하지만, 시간을 먹는 활동이기에 사용 가능하지 않은가 생각하여 본다.) 버릇이 되어서 앉기만 하면 먼저 컴퓨터를 켜는 내 자신을 보며 너무 세상 돌아가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든지 내 갈 길을 묵묵히 그리고 세상이 어떤 속도로 돌아가든지 내 페이스로 성실히 살아야겠다는 심산(心算)에 선포하는 금령이다. 꼭 필요한 이메일만 점검하는 미디어 금식을 하면, 의외로 자투리 시간이 많이 남는다. 그때는 밀린 독서를 한다. 언젠가 미디어 금식을 선포하고, 미루어 놓은 독서를 강행하다 만난 것이 “수도원 기행”으로 잘 알려진 공지영씨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라는 에세이집이었다.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것으로, 작가 스스로 “아주 가벼운, 유모스러운 글”이라고 표현한 작가의 친구, 가족, 자녀 등을 중심으로 본인의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일들을 글로 적어놓은 에세이였다. 읽으며 마음 내내 “아니, 내가 뭐 하러 이걸 읽고 있나”라는 마음이 솔솔 들 때, 갑자기 내 눈을 확 잡아당기는 한 문단의 글을 발견했다. 이런 내용의 글이었다.

 살아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의 차이 중 가장 뚜렷한 것은 살아있는 것들은 대개 쓸모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게 화분이라면 필요 없는 누런 이파리나, 그게 꽃이라면 시들거나 모양이 약간 이상한 꽃 이파리들을 달고 있다는 거다. 반대로 죽어있는 것들, 그러니까 모조품들은 완벽하게 싱싱하고, 완벽하게 꽃이라고 생각되는 모양들만으로 이루어져있다. - (공지영 에세이,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Page 98)

 아, 얼마나 맞는 말이냐! 그렇다, 살아있기 때문에 쓸모 없는 것을 포함한, 불완전한 것이 생명이다. 죽은 것은 죽었기 때문에 완전하다. 변할 필요도 없고, 변하지도 않고, 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한 문단의 글로 나는 이 책의 가치를 발견하였다.

 왜 내 삶에는 이렇듯 쓸모 없는 것들 (나쁜 습관, 나태함, 미움, 불안함 등등)이 많은지 늘 불만하였다. 알고 보았더니,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기에 쓸모 없는 것들이 생긴다. 완벽한 꽃에 좀 모양이 이상한 이파리가 달려 있는 것은 바로 생명의 상징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은 그 쓸모 없는 것들을 지고 가야 할 책임이 있다.

 주님의 주변에는 세리, 창기, 가난한 자, 부족한 자,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면 쓸모 없는 자들이 군더더기처럼 붙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생명이 있다. 율법적으로 완벽하다고 스스로 믿었던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하고 싱싱하게 생각되는 인간들로 생각되는 모양들만으로 갖추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생명을 상실한 모조품들이었다.

 주님 곁으로 참으로 쓸모 없이 여겨지는 실패한 제자들, 죄인들이 모여든 것처럼, 어쩌면 교회에도 (나를 포함하여) 그런 쓸모 없는 사람들이 모인다. 그래서 다사다난 (多事多難), 일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 교회인 것 같다. 그런데 알고 있는가, 바로 쓸모 없이 여겨지는 그 사람들이 모인, 바 그 교회에서 생명이 약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부활의 복된 생명으로 쓸모 없이 여겨지는 내 인생까지 복음의 복된 역사에 도구로 삼으시는 예수님이 좋다. 부활하셔서 교회를 세워가시는 예수님이 그래서 나는 너무 좋다. 찬미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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