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식민지 시대의 상처가 있어서인지 유독 ‘세계 최대’,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에 자부심을 갖는 듯하다. 학창시절 이런 자부심을 느끼게 한 소재 중 하나가 바로 고려의 금속활자였다. 그것이 무엇 때문에 왜 위대한 것인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세계 최초라는 그 수식어만으로도 당시 어린 우리에게는 자부심을 가지게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었다.

 우리 역사에 금속활자를 사용한 것은 고려 고종 21년(1234년)이 처음이다. 이는 인종 때 재상 최윤의 등이 지은 50권의 ‘상정고금예문’을 주자(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기록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했다는 1450년보다 무려 216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고려라는 아시아의 작은 국가가 금속활자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 표면적인 이유는 ‘물증’이 없다는 것이었다. 즉, 금속활자를 사용했다는 기록만 있지 금속활자 자체나 그 금속활자로 찍은 인쇄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그 주장의 근거였다.

 그런데 고려가 이 무렵에 금속활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현재 목판본으로 전해지고 있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라는 책에도 고종 26년(1239)에 주자로 책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고종 21년, 아니면 늦어도 고종 26년에는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고종 26년은 물론 21년도 줄잡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때는 고려가 몽고의 침입을 받아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극도의 혼란기였다. 이런 절체절명의 국난기에 금속활자를 발명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강화도로 천도한 고종 19년(1232) 이전에 이미 금속활자는 존재했다고 보고 몇몇 학자들은 그 기원을 고종 21년보다 훨씬 이전인 11세기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학자들의 이러한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인쇄된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서양인들은 한국 학자들의 주장을 무시해 왔고, 우리도 그 부분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2년 이 외의 곳에서 고려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이라는 증거를 찾게 되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립 도서관에서 우왕 3년(1377)에 간행한 ‘직지심경’이 발견된 것이다. 이 책은 서양인들에게 고려가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고종 21년보다는 143년이나 뒤이긴 하지만 그래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는 73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이것이 프랑스에서 발견된 것은 아마 대원군 시절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약탈해 간 3,000여권의 장물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다가 그 후 한국 내에서도 충렬왕 23년(1297)에 간행된 청량답순종심요법문이 발견되어 서양보다 최소한 153년은 일찍 금속활자를 사용했다는 증거물을 갖게 되어 이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직도 ‘상정고금예문’이라는 책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잇단 외침에 잠잠할 날이 없었던 우리 역사의 수난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일본이 ‘기록국가’라는 명예스런 호칭을 듣는 데에는 기록을 습관화한 일본인들의 국민성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섬나라라는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침을 당하지 않은 역사적 배경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고려의 금속활자 발명이 과연 세계사적인 사건인가를 질문해 보면 대답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세계사적 사건이이라고 부르려면 그 사건이 세계사적인 의미를 가져야 한다. 즉, 그 사건이 고려 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문화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야 세계사적인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서양사에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것이 중세 봉건사회를 해체시키고 근대사회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은 바로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이다. 루터는 1517년 ‘오직 신앙’과 ‘오직 성서’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유명한 ‘95개조 명제’를 작성해 비텐베르크의 만인성자 교회의 정문에 붙였다.

 만약에 금속활자가 없었다면 이 95개조 명제는 순진한 한 신부가 일으킨 작은 소동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속활자 덕분에 신속하게 대량으로 인쇄해 먼 지역까지 유포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국지적 논쟁에서 벗어나 광범위한 지역에서 공개적인 쟁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정고금예문’이나 ‘직지심경’, ‘청량답순종심요법문’은 당시 고려의 정치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이 된 서적들이 아니었고 일반 민중들이 볼 수 있는 책도 아니었다. 집권자의 의도에 맞춰 기획 간행된 왕실용 책이었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고려의 금속활자 발명의 의미를 축소시킬 수는 없지만, 고려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그 시대적 상황과 사용하는 사람들의 활용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는 역사적 교훈은 얻을 수 있다. 한글이 문자의 기능면이나 운용면에서 세계 최고의 문자로 손색이 없지만 아직도 세계적인 문자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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