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전 이 미국의 한 잡지에 난 기사입니다. 한 남녀가 서로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군에 간 남자가 갑자기 이라크 전쟁터로 파병되었고, 치열한 전쟁속에 이 남자는 폭탄을 맞아 한쪽 다리를 잃은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이 남자가 생각하기를, ‘내가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면 사랑하는 그녀에게 짐만 될 뿐이야, 차라리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자, 그래야 그녀가 건강한 사람을 만나 행복하겠지...’ 그리고 그 남자는 귀국하여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그녀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그에게 몇 년 후 그녀의 결혼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남자는 칼로 도려내듯이 마음이 아팠지만 ‘사랑하는 그녀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러면서 견뎠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그녀가 너무 그립고 그녀의 행복한 모습을 멀리서라도 한번 보고 싶어서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길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 그녀의 집을 살피던 남자의 눈에 그 집의 정원이 들어왔고, 그곳에는 그렇게 사랑하는 그녀가 휠체어를 밀면서 그 휠체어 위에 앉아있는 한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이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남자가 전쟁터에서 불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 여자는 그 남자를 찾다못해 전쟁터에서 두 다리를 잘린 사람을 택해 결혼하고 그 남자의 발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 사실을 깨달은 남자는 이렇게 흐느꼈다고 합니다. ‘흑흑흑..! 바보같이, 바보같이...’ 그 기사의 제목이 ‘바보같은 사랑’이였습니다. 누가 바보라는 걸까요? 자신이 바보라는 걸까요? 그런 남자와 결혼한 그녀를 향해 바보라고 하는 걸까요? 참 사랑은 바보들이라야 가능합니다.

 세상에서는 기독교를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성자가운데 한 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석가도, 공자도, 마호멧도, 소크라테스도 다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의 생노병사를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무거운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사람의 몸을 잠시 빌려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죽음도 다릅니다. 다른 위인들처럼 끝까지 살다가 자연사한게 아니라, 33세에 스스로 고난의 비아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셔서 스스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시는 순간 이렇게 외치셨지요. ‘다 이루었다’ 자기가 하려던 일을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고 죽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누구나 미완성작품을 남기고 후회하면서 죽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들의 구원과 영생의 길을 다 마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얼마든지 안 죽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도 흥정했습니다. ‘우리 말 잘 들으면 살려주겠다고..’ <본디오 빌라도>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네 자신을 변호하라고, 네가 누구냐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죽으러 왔다고, 내가 죽어야 많은 사람을 살린다고..’ 그러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바보같이... 다른 위인들과 다른 것입니다. 다른 위인들은 이 땅에 살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속에서 목적을 찾아 나갔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하늘에서부터 목적을 갖고 오셨습니다. 그 목적대로 그 장소에 태어나시고, 그 목적대로 그 혈통으로 오시고, 그 목적대로 사시다가, 그 목적대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이땅에 오셔서 소의 멍에(인생의 짐)를 다루는 생애를 사시다가, 멸시와 천대와 침뱉음과 희롱과 채찍과 가시관(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받아 생긴)을 쓰시고 비아돌로로사(고난의 길)를 지나 골고다(해골)의 언덕까지 십자가를 친히 짊어지고 사셔서 그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그 해골들위에 생명의 피를 쏟으셨습니다. 로마군인들이 못은 밖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 스스로를 못박으신 것입니다. 왜요? 그 방법외에는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보혈의 피 외에는 죽음의 바이러스에 오염되어 있는 인류를 살리는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피를 받은 모든 해골(인생의 궁극적 모습)들이 살아나고, 문둥이가 되었던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도 그 피로 인해 깨끗하게 낳은 것이지요.

 지난 겨울 동부쪽에 엄청난 눈이 왔을 때, 그쪽에 사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집 마당에 굶고 얼어서 바싹 말라죽은 참새들이 많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게 마음에 걸려서 이 목사님이 먹을걸 찾아 헤매는 참새들에게 쌀을 한움큼 쥐고 다가갔는데, 그런데 생명의 쌀을 들고 다가가는 순간 똑똑한 참새가 다 날라가 버리는 바람에 도무지 뭘 좀 먹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걸 먹으면 사는데, 이걸 먹으면 죽지 않을텐데..’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 참새가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죽지 않을텐데...’ 그러다가 문득 이 땅에 와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이 생각났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죽으시는 그런 미련한 방법을 택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사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대신 죽으시는 속죄양으로 오셨습니다. 이 바보같은 사랑을 바보처럼 믿는 사람이 구원받습니다. 바보들이 몹시 그리운 고난주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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