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선덕여왕>에 등장한 미실(고현정 분)은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력뿐만 아니라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시청자의 주목을 끌었다. 풍월주(화랑의 수장)인 세종·설원과 결혼한 미실은 진흥왕·진지왕과도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진평왕의 왕후가 되려다가 실패한 적도 있다.

 그런 미실 못지않게, 아니 미실보다 한 술 더 뜬 고구려 여인이 있었다. 이른바‘고구려판 미실’이라 할 수 있는 이 여인은 우씨 왕후다. 우씨 왕후는 본래 고구려 고국천왕(재위 179~197년)의 부인이었다. 우씨는 고구려를 구성한 5부 중 하나인 제나부(절노부) 소속이었다.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제나부(절노부)는 왕비족이었다. “절노부는 대대로 왕과 혼인했다”고 <삼국지>는 말하고 있다.

 왕비족 소속으로서 고국천왕 2년 2월(180.3.14~4.12)에 왕후가 된 우씨는 고국천왕 19년 5월(197.6.3~7.2)에 남편을 잃었다. 고국천왕이 죽은 것이다. 왕의 죽음을 비밀에 부친 우씨는 그날 밤 곧바로 후계자 물색에 나섰다. 급히 후계자를 찾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고국천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씨가 처음 찾아간 곳은 왕의 첫째 동생인 고발기의 집이었다. 남편의 죽음을 숨긴 상태에서 우씨는 고발기에게 “왕에게 후계자가 없으니, 당신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밤중에 형수가 찾아와서 다짜고짜 “당신이 왕이 되라”고 하니, 고발기로서는 형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발기는 “이런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라며 형수를 돌려보냈다.

 고발기에게 무안을 당한 우씨는 왕의 둘째 동생인 고연우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연우의 태도는 고발기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한밤중에 은밀히 찾아온 형수를 매우 환대했다. 심지어는 술까지 대접했다. 고연우의 태도가 고발기와 달리 ‘우호적’이라고 판단한 우씨는 그제야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고발기에게는 알리지 않은 왕의 죽음을 고연우에게는 솔직하게 알린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고발기에게 한 것과 똑같은 제의를 했다. 당신이 왕이 되라고 말이다. 고연우는 형수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자 우씨는 “나를 궁중까지 데려달라”고 부탁했고, 고연우는 왕후와 함께 궁중으로 들어갔다.

 시동생과 함께 궁궐에 돌아온 우씨 왕후는 다음 날 새벽에 대신들을 모아 놓고 “왕이 고연우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다”는 거짓 유훈을 명분으로 고연우를 왕위에 앉혔다. 이때 즉위한 고연우는 산상왕(재위 197~227년)이라는 시호로 알려져 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고발기는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했지만, 국민여론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3일 만에 포위를 풀고 요동(만주)으로 도망갔다.

 산상왕을 세운 다음에 우씨는 산상왕과 결혼했다. 고국천왕의 왕후가 고국천왕의 동생인 산상왕의 왕후가 된 것이다. 왕후 ‘연임’에 성공한 것이다. 한 여인이 연속으로 두 임금의 왕후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런 흔치 않은 일의 주인공이 바로 고구려판 미실인 우씨 왕후였다.

 드라마 <선덕여왕>이나 필사본 <화랑세기> 속의 미실은 왕후가 되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러워했다. 그런데 우씨 왕후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왕후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니, 미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여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럼, 고구려인들이 우씨의 남성편력을 용인한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지>에서는, 우씨가 소속된 제나부가 고구려의 왕비족이라고 했다. ‘왕이 되려면 왕비족과 혼인해야 한다’는 관념이 정치질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관념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왕족 남자가 혼인할 수 있는 여성의 범위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새로 즉위한 산상왕이 결혼할 수 있는 여성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씨가 왕후 연임에 성공할 수 있었던 본질적 요인은 왕족의 결혼상대방을 왕비족으로 한정하는 정치제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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