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섭(포근한 교회 담임목사)

 그녀가 웃으면 모나리자가 웃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간호대학 1학년이었고 저는 대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대학교 동아리 모임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녀에게 점점 관심이 깊어졌고 그녀도 저를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녀와 데이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언제나 저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때때로 선택하는 것은 즐거움을 주기도 했지만 저에게는 매우 피곤한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고상하고 순결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녀를 대할 때 늘 조심했습니다. 그녀는 가끔 제가 손이라도 잡아주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결혼 후로 미루었습니다. 1973년도 겨울방학에 저는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방학이 끝난 후 학교에 왔을 때, 그녀의 친구로부터 그녀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맥주홀에 갔었습니다. 여자 혼자 크리스마스이브에 맥주를 마시는 것을 본 한 남자가 합석을 했습니다. 그 남자는 음흉한 생각을 갖고 그녀가 취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너무 취해 몸을 가누지도 못하자 그 남자는 결국 그녀를 업어 그녀의 자취방에 데려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녀의 푸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데이트할 때 제가 박력 있게 그녀를 식당도 데리고 가고, 데이트 장소도 제가 정하고, 분위기가 좋을 때 손이라도 잡아주기를 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청순하게 보였던 그녀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맥주를 15병이나 마셨다는 것을 듣고 그녀와 급히 결혼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1977년도 육군중위(ROTC)로 복무할 때, 춘천 적십자병원의 간호사였던 ‘S’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고운 마음씨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서로 결혼할 것을 약속한 사이로 발전했습니다.

 저는 1978년 제대한 후 인천의 한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저는 인천에서 서울로 오고 그녀는 근무를 마치고 춘천에서 서울로 와서 서로 만났습니다. 그 때는 통행금지(밤12시부터 새벽4시까지 통행이 금지됨) 법이 시행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만났습니다. 이 교회는 매주 금요일 철야기도회로 모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밤새워 기도도 하고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둘이 만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새벽에 그녀가 가져온 도시락을 먹고 그녀는 춘천으로 저는 인천으로 향했습니다. 그녀는 뜰에 있는 호두나무로부터 딴 호두로 과자를 만들어오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집안 부모님과 형제간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반대가 심해지자 만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만나지 못한지 2개월이 지나 견딜 수 없어 춘천에 갔습니다. 그녀의 동생이 저를 보더니 깜짝 놀랐습니다. 언니가 한 달 전에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사업을 하던 분과 선을 본 후 1주일 만에 약혼하고 5일 만에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큰 상처를 받은 저는 어떻게 시간이 지나가는지 모르며 살았습니다. 그 당시 저를 본 사람들은 제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일주일쯤 후 그녀가 인천으로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50여장의 결혼사진이 들려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고, 시집 식구들이 그녀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미국에 가고 싶어 했는데 시민권자하고 결혼했으므로 곧 영주권도 나올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저를 찾아 온 이유는 제가 계속 교회에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가장 큰 고통은 철야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짝을 지워주셨다고 수없이 감사기도를 드렸는데 이제까지 드렸던 기도가 허사가 되어버렸고,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인가? 라는 의문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깨달은 것은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오직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한분뿐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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