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짝패>는 조선 제25대 철종의 즉위(1849년)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드라마 속에서는 조선왕조의 말기적 징후가 종종 노출되고 있다. 그런데 철종 이전에 이미 조선왕조의 쇠락 징후를 간파한 쪽이 있었다. 바로 12세기부터 메이지 유신(1868년) 이전까지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일본의 막부정권이었다.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은 한반도였다. 바닷길이 활성화된 16세기 이전에 일본이 세계무역에 참여하자면 기본적으로 한반도를 매개로 대륙과 교류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대표상품인 비단은 한반도를 통해 일본열도에 전해졌고, 일본의 대표상품인 은은 한반도를 통해 중국대륙에 전해졌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일본은 조선의 비위를 맞추고 조선을 최고의 ‘전략적 동반자’로 대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극진히 환대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통신사는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교체될 때마다 일본을 방문하여 양국의 친선 증진에 기여했다. 통신사 행렬은 대마도를 거쳐 에도(동경)까지 가는 동안 일본 백성들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이것은 일본에 엄청난 재정 부담이었다. 통신사가 지나가는 각 지역에서는 환영 비용을 분담해야 했다. 최종 목적지인 에도에 당도하면, 막부는 빙례라는 거대한 예물교환의식을 열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통신사의 에도 방문은 조선·일본의 친선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신막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의미했으므로, 막부정권은 재정 부담에도 통신사를 기꺼이 에도까지 초청했다. 그만큼 조선이 일본에 중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본은 조선이 시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닷길을 통한 동남아·중앙아·중동·서유럽과의 교역이 확대되면서 조선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계속해서 낮아진 탓이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시선이 싸늘해지기 시작한 시점은 흥미롭게도, 한국인들이 흔히 조선왕조의 르네상스 시기라고 생각하는 정조시대였다. 영·정조 시대에 조선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청나라·일본은 그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 일본이 조선을 따라잡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는 징후가 표출된 것은 정조 11년(1787)이었다. 이때 일본에서는 도쿠가와막부의 제11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취임했다. 관례대로라면, 조선통신사를 에도에 초빙해서 거대한 빙례를 열고, 조·일 간의 우호를 다지는 한편 신막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획득해야 했다.  그런데 막후 실권자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이 거창한 행사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렇게 막대한 비용을 투입해야 할 만큼 조선이 중요한 나라인가? 이제는 우리도 조선에 뒤지지 않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통신사 빙례를 당장 없앨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할 경우, 엄청난 외교 혼란이 초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방안은 통신사 빙례를 에도가 아닌 대마도에서 약식으로 치르는 것이었다. 이것을 역사학 용어로는 역지빙례라 한다. 역지빙례를 실시할 경우 일본으로서는 엄청난 재정 부담을 덜 수 있었다. 통신사가 지나가는 지역마다 큰 비용을 부담해야 했으므로, 통신사가 대마도까지만 왔다 가면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대마도를 통해 조선 측에 이런 뜻을 전달했다. 일본의 갑작스런 태도 돌변에 조선은 당혹감과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조선통신사를 문전박대하는 조치를 조선 정부는 수용하기 힘들었다. 조선이 거부의사를 표출했기 때문에, 양국은 이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줄다리기를 벌여야 했다. 결국 순조11년(1811), 조선은 결국 일본측 요구를 수용했다. 대마도에서 통신사 빙례가 열린 것이다. 이것은 일본 본토가 아닌 대마도에서 열린 최초이자 최후의 빙례였다. 그 후로는 대마도에서마저도 빙례가 열리지 않았다. 조선과의 우호를 유지하기 위해, 조선의 외교 승인을 얻기 위해 단 한 푼이라도 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일본 막부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은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국제적으로 서서히 낙오되기 시작했다. 외부세계의 주의 깊은 관찰자들은 이미 그때부터 조선의 쇠락 징후를 간파했다. 일본 막부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은 순조 11년(1811) 홍경래의 난을 필두로 해서 왕조의 쇠락을 보여주는 징후들이 19세기 초부터 나타났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의 TV 사극들은 철종시대나 고종시대를 다룰 때에는 조선왕조를 우울하게 스케치한다. 반면, 정조시대를 다루는 드라마에서는 활력과 생기가 넘쳐난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운명을 정확히 묘사하려면, 이미 정조시대 후반부터 불온한 기운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