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 출도요!"
 한국인들에게 이만큼 짜릿하고 시원스러운 표현도 드물 것이다. 신분을 숨기고 남루한 차림으로 암행하던 이몽룡이 병졸들을 데리고 나타나 악질 변사또의 생일상을 뒤엎고 옥에 갇힌 애인을 구하는 <춘향전>의 명장면은, 보고 또 봐도 지루하지 않다.  소설이나 드라마 속 어사들뿐만 아니라 실제의 어사들도 반드시 준수하고자 했던 암행(暗行). 암행어사의 생명은 '암행'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제대로 지켜졌을까?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데 성공했을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어사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해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신분이 노출된 상태에서 그것을 수행했다. '암행어사가 뜰 것이다'는 첩보를 입수한 지방관들이 사전에 대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조선 제11대 중종(재위 1506~1544년) 때 처음 파견된 암행어사는 주로 종3품 이하의 당하관 중에서 임명되었다.암행어사 파견은 은밀히 이루어져야 했지만, 100% 비밀유지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경우 총리급 즉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추천에 따라 주상(왕의 공식명칭)이 임명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부터 일정 정도는 비밀이 샐 수밖에 없었다.

 왕궁에서 주상을 알현하고 나온 암행어사는 집에 들르지 않고 그 길로 한성을 나서야 했다. 그는 한성을 벗어나기 전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받은 봉서(封書)의 겉면에는 "숭례문(남대문) 밖에 가서 개봉하라"는 명령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행어사가 숭례문 밖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신원과 미션을 알아낸 누군가가 말을 타고 지방을 향해 미리 출발했다면 어떨까? 이런 경우에는 가장 빨리 미션을 알아야 할 암행어사가 가장 늦게 미션을 알아차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숭례문을 나온 암행어사는 해진 옷과 부서진 갓의 폐포파립(弊袍破笠)으로 불우한 선비 행세를 하고 임지로 출발했다. 이렇게 철저히 위장을 하기는 했지만, 상당수의 어사들은 임지에 당도하기도 전에 신분이 노출되었다. 현지 관아에서 관련 첩보는 물론 어사의 인상착의까지 확보해두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중종 29년 5월 14일 조정에 올라온 암행어사 오세우의 감찰보고에 따르면, 오세우가 경상도 옥포에 당도하자 그의 얼굴을 확인한 경비병들이 즉각 성문을 닫아걸었다고 한다. 오세우의 보고에 따르면, 그가 "제발 문 좀 열라"며 온갖 방법으로 타일러도 경비병들이 들은 척도 안 했다고 한다. 경비병들은 시간이 한참 지난 연후에야 겨우 성문을 열어주었다. "어사가 떴다!"는 첩보를 관아에 전달하고 관아에서 관련 자료를 숨기는 데 필요한 시간만큼, 오세우는 성문 입구에서 대기해야 했을 것이다.

  실록에 보고된 또 다른 사례들에 따르면, 어사의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성문을 꽁꽁 닫아두고 열어주지 않은 고을이 많았다. 그런 경우 암행어사가 할 수 있는 일은, 포기하고 그냥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위와 같이 '암행'이란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암행어사의 신원과 미션, 심지어는 인상착의까지 사전에 누설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사전에 신분이 노출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고 하여 이 제도가 실효성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지방관들이 어사의 출현 가능성을 항상 의식하고 경계했다는 점은 이 제도가 지방 수령들의 부정부패를 어느 정도 견제하고 억제하는 데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종 때부터 실시된 이 제도가 구한말까지 계속 유지된 사실만 보더라도, 이 제도가 일정 정도는 효과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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