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 왕자 담덕(이태곤 분)은 중국 왕조인 후연과의 전쟁에서 능력과 가능성을 입증했다. 군령을 어기면서까지 몸을 불사른 담덕의 용맹함이 아니었다면, 드라마 속의 고구려는 훨씬 더 어려운 싸움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태자가 아닌 왕자가 명성을 얻는 것은 후계구도를 교란시킬 수 있다'는 논리에 따라 담덕은 전공을 세우고도 왕궁에서 쫓겨나고 노예시장에까지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하지만, 후연과의 전쟁은 그가 고구려를 책임질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실제 담덕이 싸운 상대는 중국이 아니라 백제였다.  물론 동족(부여족)인 백제와의 전쟁에서 떴다고 하기보다는 이민족(선비족+한족)인 후연과의 전쟁에서 떴다고 하는 것이 광개토태왕의 '위신'을 살려주겠지만, 역사는 사실 그대로 알려져야만 한다. 사실 그대로의 역사에 주목할 경우, 우리는 즉위 이전의 담덕이 중국이 아닌 백제와의 전쟁에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 광개토태왕 즉위 이전 즉 고국양태왕(재위 384~391년) 때의 대외관계를 2개의 시기로 나눌 필요가 있다. 제1기는 고국양태왕 1~2년(384~385)이고, 제2기는 고국양태왕 3~8년(386~391)이다.  제1기에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나라는 후연이었다. 이 기간에 고구려는 후연을 상대로 1승 1패를 기록했다. 이때 담덕(374년 출생)은 11~12세인 데다가 일반 왕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큰 전쟁에 나가 공로를 세울 여지가 없었다.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는 왕자 담덕이 후연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고 했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2기가 시작된 고국양태왕 3년 1월(386.2.15~3.16)에 13세의 담덕은 태자로 책봉되었다. 고국양태왕 재위기의 대부분인 386~391년 기간에 고구려가 상대한 쪽은 중국이 아니라 백제였다. 이는 즉위 이전의 담덕이 중국 무대가 아닌 백제 무대에서 실력과 명성을 쌓을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편에서도 담덕의 즉위 이전부터 백제인들이 그의 지휘능력을 인정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만 놓고 보면 즉위 이전의 담덕이 지휘능력을 보여주는 정도에 불과해 보인다. 하지만, <조선상고사>를 보면 즉위 이전의 담덕이 백제를 상대로 2차례나 대승을 거두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는, <삼국사기>에서 담덕의 즉위 직후에 벌어졌다고 기록한 2건의 전쟁은 실제로는 즉위 직전에 벌어진 것들이라고 지적했다. 2건이란 백제 석현성 등 10여 개의 성을 함락한 것(이하 '석현성 대첩')과 관미성을 함락한 것(이하 '관미성 전투')을 가리킨다.  이런 점을 보면, 즉위 이전의 담덕이 중국 무대가 아닌 백제 무대에서 능력과 가능성을 보여주었음을 알 수 있다.

  즉위 이전의 태자 담덕이 중국이 아닌 백제를 상대로 명성을 쌓았다는 사실은 결코 한민족의 치부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광개토태왕의 명성에 흠이 될 수 없다. 도리어 이 사실은 당시의 백제가 중국 못지않게 강성했으며 고구려에 위협적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당시의 한국이 '세계시장'에 내놓을 만한 2개의 강대국을 보유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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