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꿈꾼 수나라 양제(수양제). 무리한 대운하 건설로도 유명한 수양제의 세계정복 야망을 무참하게 수장시킨 것은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었다.  서기 612년, 수양제는 위풍도 당당하게 113만38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동방을 향한 진격에 나섰다. 수나라 군대의 규모가 어찌나 컸던지, 맨 앞과 맨 뒤의 거리가 거의 1천 리에 가까울 정도였다. 게다가 황제를 따라나선 관료들의 행렬도 맨 앞과 맨 끝이 80리 거리였다.  이런 수나라 군대의 기세를 꺾고 그들에게 참패의 추억을 안긴 것이 살수 즉 청천강에서의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살수대첩에서 기가 꺾인 수나라는 뒤이은 몇 차례의 전쟁에서 '체력'을 완전히 소진한 끝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으니, 살수대첩은 세계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고구려-수나라 전쟁에서 '숨은 어시스트'를 기록한 인물이 있었다.바로 백제 무왕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수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인정했다. 상국은 일종의 패권국 같은 개념이었다. 신하국은 상국의 패권을 인정하는 대신, 그로 인한 위신의 손실은 무역흑자로 보충했다.  일반적인 경우, 신하국이 조공을 하면 상국은 훨씬 더 많은 회사(回賜, 답례)를 지급했기 때문에, 신하국은 무역흑자를 챙길 목적으로 상국에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수나라에 대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조공은 본질적으로 무역흑자를 챙기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도 대부분 다 그러했다. 별다른 이익도 없이 남의 나라에 고개를 숙일 나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드물었다.

  이처럼 국제관계는 냉정한 것인데도, 조공국의 의도를 간과하고 그저 기분에 들떠 나라를 망친 통치자들이 있다. 이익을 얻어내기 위한 조공국의 아첨성 발언을 곧이곧대로 듣다가 나라를 망친 군주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수양제였다. 612년 고구려 침공 당시 수양제가 위풍당당한 기세를 연출한 데는 나름대로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다. 113만 대군도 듬직했겠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의지처가 있었다. 그것은 백제 무왕의 협공 약속이었다. 수나라의 역사서인 <수서> 권81 '동이 열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업 7년(611), 황제가 직접 고려(고구려)를 치려 하자, 부여장(무왕의 이름)은 신하 국지모를 시켜 출병 기일을 묻도록 했다. 황제는 매우 기뻐하며 회사(답례)를 두둑이 한 뒤, 상서기부랑 석률을 보내 함께 주관하도록 했다."

 수양제의 군사계획을 확인한 무왕은 사신을 파견해서 출병 기일을 확인했다. 이것은 협공을 해주겠다는 의사표시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감동한 수양제는 백제에 2가지 이익을 제공했다. 하나는 조공에 대한 답례를 여느 때보다 훨씬 더 두둑하게 해준 것이다. 백제에 더 많은 무역흑자를 제공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군사기밀의 공유였다. 수나라 사신이 백제에 가서 출병 문제를 함께 주관하도록 한 조치는, 군사기밀을 공유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음 해인 612년, 수양제는 무왕의 약속을 철석처럼 믿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대를 움직였다. 그런데 믿었던 백제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무왕은 수양제의 침공과 때를 맞춰 백제-고구려 국경지대에 군사력을 집중 배치했지만, 그는 그냥 그것으로 끝냈다. 수양제의 기대와 달리, 그는 백제 군대에 국경을 넘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출병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 점령의 환상에 빠진 수양제의 심리를 이용해서 무역흑자도 늘리고 군사정보도 빼낼 욕심에서 그저 거짓으로 아첨을 했던 것이다.

  무왕이 같은 부여족인 고구려를 돕겠다는 의지를 갖고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고구려는 백제의 중립정책 덕분에 수나라와의 전쟁에 좀더 집중할 수 있었다. 만약 백제가 동시에 협공했다면, 고구려는 훨씬 더 힘든 전쟁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됐더라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과연 가능했을지도 의문이고, 설령 그것이 가능했더라도 그 효과는 반감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 백성들과 백제 무왕도 살수대첩의 숨은 공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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