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에 등장하는 왕의 남자 시종, 즉 내시(內侍)들의 모습은 천편일률적이다. 아침마다 면도할 필요 없는 얼굴, 약간 구부정한 상체, 남성답지 않은 목소리, 거기에다 결정적으로 모두 고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중국에 비해 내시가 훨씬 늦게 출현했고,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무시무시한 의미의 ‘남성 커트’가 있었다. 고조선 시기의 중국에서는 ‘남성’ 즉 남성성을 합법적으로 ‘커트’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궁형 즉 거세형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남성’을 거세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존재했기에 고자들이 ‘대량 생산’될 수 있었고, 그랬기에 그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환관 조직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내시 언제부터 등장했을까
 한국의 경우는 달랐다. 한국에서 ‘남성 커트’가 시작된 것은 몽골 간섭기(1270년 이후) 즉 고려 후기였다. 몽골제국(원나라) 황실에 바쳐진 고려인 고자들이 출세하는 모습을 보고서 고려 하층민 사이에서 자발적인 궁형이 유행한 것이다. <고려사> ‘환자 열전’에 당시의 풍경이 스케치되어 있다. 환자(宦者)란 환관·내시·내관과 같은 말이다.  “잔인하고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이것(몽골에서 출세한 고자들)을 부러워하여, 아버지는 아들을 거세하고 형은 동생을 거세했다. 또 강포한 사람들은 좀 분한 일이 있으면 스스로 거세했다. 불과 수십 년 만에 거세한 사람들이 매우 많아졌다.”  이 글은 고려 후기부터 고자들이 궁중 실세로 성장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 중 하나를 설명해준다. 중국에서처럼 공식적인 궁형 제도가 발달한 것은 아니지만 고려 후기에 자발적인 궁형이 유행한 탓에 고자들의 대량 공급과 조직화가 가능해졌고 그 때문에 그들이 고려 후기부터 궁중 실무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자발적 궁형이 유행하기 이전에 고려 왕궁에 있었던 내시들과 몽골제국에 바쳐진 고려 출신 내시들은 어떤 원인에 의해 ‘남성’을 잃었을까? <고려사> ‘환자 열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고려의 엄인(환관)들은 본래 일반 서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천한 노비들이었다. 고려에서는 부형(腐刑, 궁형·거세형)을 행하지 않았기에, 어렸을 때에 개에게 물린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고려에는 본래 궁형이 없었기 때문에 비인위적 원인에 의해 고자가 된 사람들을 궁궐에서 채용했음을 알 수 있다. “개에게 물린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고자가 된 대표적인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 외의 원인에 의해 고자가 된 사람들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몽골 간섭기 이전의 고려 사회에서는 ‘남성’을 인위적으로 거세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 이전만 해도, 궁에서 고자를 확보하기 어려웠고 또 전문적인 내시제도가 존재하기 힘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고려 전기까지도 한국의 내시제도가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럼, 고려시대 이전에는 어떠했을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이 왕후인 장화부인을 잃은 뒤에 재혼을 거부하고 여자를 멀리했다고 말하면서, 그 주변에 오로지 “환수” 즉 내시뿐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사에서 내시가 등장하는 기록으로는 이것이 최초다.

 중국만 해도 이미 기원전부터 내시들이 맹활약을 했다. 또 고려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내시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에 비해,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시대에는 그런 인물들이 전혀 없다는 점은, 한국의 내시제도가 나당연합 이후에 등장했을 것이라는 추론에 힘을 실어주는 요소다. 그러므로 드라마 <계백>의 시대적 배경인 서기 7세기 초반의 백제 궁궐 안에는 고자 출신 내시들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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