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철(성신전원교회)

 공작새의 수컷은 화려한 꽁지깃으로 암컷에게 구애한다. 암컷은 가장 화려하고 큰 꽁지 깃을 가진 수컷을 선택하는데,  우리가 아는 모든 아름다운 공작새는 암컷이 아니라 수컷이다. 이런 수컷의 날개는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암컷의 눈에 띄기는 쉽지만 하나의 커다란 맹점도 있다. 그것은 바로 화려한 만큼 암컷의 눈에 들기도 쉽지만 천적의 눈에 띄기도 쉽다는 점이다. 이러한 수컷이 형형색색의 화려한 날개를 펼치는 모습을 보면 가장 교만한 극치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수컷 공작새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며 한바퀴를 도는데 마침내 가장 보기 흉한 자신의 뒤태를 드러내고 만다. 아는지 모르는지 수컷은 그 교만의 끝에 흉한 꼴을 만물에게 보이게 된다. 그렇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너무 교만해서 마치 공작새처럼 한껏 자신의 착각 속에서 자신이 교만한 것을 자신 스스로 뽐내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그 흉한 뒷모습을 들키게 되는 것이다.

 다윗의 유랑시대에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나발이란 ‘어리석은 자’란 뜻이다. 그는 아주 유복하고, 게다가  어질고  아름다운 아내를 두고 있었다. 그에게는 매일 매일이 만족스러웠고 화려한 잔치를 하며 한 것 자신의 부를 자랑하며 살았다. 나발에게 다윗의 호의라든가,  선의가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그래 나발은 다윗의 사환들에게,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하고 큰 소리로 물리쳤다. 교만한 자의 말은 항상 이와 같다. 모두가 자기의 힘으로 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나발이라는 사람은 종국에 심장마비로 인생의 끝을 맞이하게 된다.

 사람의 숨은 호의라든가, 일, 후원,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모두 뺀다면, 도대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남을 것이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눅12:13-21). 그 주인공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다...만일에 자기가 얼마나  교만한지를 알고 싶거든 “다른  사람이 나를 대수롭지 않게 대할 때에,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에, 쓸데없이 간섭을 할 때에, 나를 돌보아 주는 척할 때에,  또는 사랑을 할 때에, 내가  그것을 얼마나 싫어하는가” 하고 자문자답해 보면 알 것이다. 각 사람의 교만은 서로 경쟁을  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이번 모임에서는 내가 좌지우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것이 그처럼 보기 싫은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모든 악은 말하자면 우연히 경쟁적이 되는 수가 있으나 교만은 본질이 근본적으로 경쟁적 이라는 것이다.  교만은 나보다 더 가질 때에만 기쁨을 얻는다. 우리는 사람들이  돈이 많거나, 똑똑하거나 잘 생겼을 때에 교만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돈이 많거나, 더  똑똑하거나 더 잘 생겼을 때에 교만하다. 만일에 다른 사람도 다 돈이  많아지고 똑똑해지고 잘 생기게 되면 교만할 이유가 조금도 없어진다.  남과 비교할 때에 교만하게 되고 남보다 위에 있게 되는 데서 기쁨을 느끼게  된다. 경쟁적 요소가 없어지면 교만도 없어진다. 이와 반대로 우리의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심정은 사람과의 관계나 서로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이웃에게 나타내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겸손이란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위에서 본 모든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  겸손을 배우자.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기를 힘쓴다. 즉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여 서로 종이 되며 각각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 순복하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의 생활이다.  지혜에 있어서나 재능에 있어서나, 혹은 받은바 신령한 은혜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사람을 낫게 여길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질문은 마음속의 참겸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광명한 빛 가운데 자신은 진실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죽일 때까지 나타나는 것이 겸손이다. 이러한 사람은 오직 “오, 주여 당신을 찾으려고 나는 나 자신을 버렸사오니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케 마옵소서”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되고서야  비로서 자기중심의  모든 생각을 끊어 버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고 , 또  자기를 위해서 구하지 않고 오직 자기를  하나님의 종으로 또는 모든 사람의 종으로 생각하게 된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시기와  질투란 없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섬김과 존경  받음을 볼 때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다른 사람은 칭찬을 받고 자기는 오히려 천대받고 무시당해도  참을 수 있다.  이는 그가 마치 바울 사도와 같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그 정신을 배웠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사람은 마치 예수님께서  자기의 기쁨을 위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존귀를 구하지 않으신 그 마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동료들의 실수와 죄를  보고 날카로운 말로 책망하고픈  유혹을 받을 때에도 겸손한 사람은 “서로 참으며 서로 용서 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해 주신 것같이  하라”고 여러 번 말씀하신 이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생활에 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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