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뿌리 깊은 나무>에서, 화면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가장 많이 거명되는 인물이 있다. 삼봉 정도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조선 건국공간에서 사대부 중심의 세상을 추구하다가 왕권 중심주의자 이방원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정도전. 그가 죽기 직전에 ‘사대부 중심의 세상을 건설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게 이 드라마의 설정이다.

 조선의 시조는 이성계다. 하지만, 그는 형식적 시조에 불과했다. 태조 원년 7월 17일(1392.8.5) 조선을 세운 실질적 시조는 다름 아닌 정도전이었다. 건국을 향한 아이디어나 추동력은 기본적으로 정도전에게서 나온 것이다. 일례로, 최초의 헌법전인 <조선경국전>도 그가 ‘개인적’으로 집필한 것이었다.또 경복궁 앞 세종로 사거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는 도로의 구조, 경복궁이니 안국동이니 가회동이니 하는 사대문 안의 지명들도 기본적으로 그에게서 나왔다. 건국현장에서 정도전은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그렇기 때문에 태조 7년 8월 26일(1398.10.6)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피살되고 이방원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조선은 실질적으로 정도전의 나라였다. 그날까지의 6년간은 이씨 조선이 아니라 정씨 조선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 1398년 10월 6일 마지막 숨을 쉬기 직전에 정도전이 남긴 말은 무엇이었을까? <뿌리 깊은 나무>에서처럼 ‘사대부 중심의 세상을 건설하라’고 말했을까? 그날 밤 이경(二更, 밤 9~11시)에 벌어진 정도전 최후의 현장으로 가보자.   10월 6일 밤, 이방원은 이숙번의 군대를 거느리고 경복궁 앞에 포진했다.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 그 시각, 정도전은 측근들과 함께 경복궁 근처인 송현마루에 있었다. 정도전의 측근인 남은의 첩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 집 정자에서 정도전은 남은을 비롯한 측근들과 더불어 10월 밤의 정취를 느끼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방원 측은 공격 개시에 앞서 이웃집 3곳에 불을 놓았다. 도주 경로를 미리 차단하는 한편, 정도전을 당황케 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그런 뒤에 병력을 집 안으로 투입시켰다. 정도전을 포함한 몇몇은 담을 넘고, 나머지는 몰살을 당했다.

 이방원과 측근들은 정도전을 찾아 옆집으로 난입했다. 이방원은 수하 4명을 시켜 집안을 샅샅이 뒤졌으며, 잠시 후 침실에서 정도전이 끌려나왔다. 그런 뒤, 그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이방원의 수하에 의해 목이 베였다.  정도전이 남긴 그 한마디가 무엇인가와 관련하여, 이방원 측의 기록과 정도전 측의 기록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방원이 정권을 잡은 뒤에 기록된 <태조실록>에 따르면, 침실에 숨어 있던 정도전은 이방원의 수하들이 호통을 치자 조그마한 칼을 쥔 채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고 한다.  수하들이 칼을 버리라고 꾸짖자, 정도전은 칼을 문 밖으로 던지고는 이방원에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는 이를 반박하는 자료가 있다. 정도전이 죽기 직전에 읊은 시 한 수가 그것이다. 제목은 자조(自嘲)다. ‘나를 비웃다’란 뜻의 시다.

 두 왕조에 한결 같은 맘으로 공을 세워(操存省察兩加功)
 책 속 성현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건만(不負聖賢黃卷中)
 삼심년 동안 애쓰고 힘들인 업적(三十年來勤苦業)
 송현 정자에서 한 번 취하니 결국 헛되이 되누나(松亭一醉竟成空)

 이 시에 따르면, 최후의 순간에 정도전은 30년 업적을 한 잔의 술로 날려버린 자기 자신을 비웃는 달관의 여유를 보이며 세상을 떠났다. 이방원 수하들의 호통을 들으며 엉금엉금 기면서 목숨을 구걸했다는 <태조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이 시에 나타난 정도전은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당당한 패장의 모습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한 순간의 방심으로 모든 것을 놓친 정도전은, 최후의 순간에는 사대부 중심이니 왕권 중심이니 하는 정치적 이해관계마저도 다 털어내고 자신의 생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스스로를 비웃는 철학자적 여유를 보였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불행한 최후였지만, 인간적으로는 꽤 멋있는 최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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