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 18일, 제125대 아키히토 일왕(천황)의 발언은 한일 양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제50대)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다."  기자회견에서 나온 이 발언은, 일본 왕실과 한국의 혈연적 인연을 일왕 스스로 공식 인정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사실, 고대 일본이 한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일왕이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비단 왕실의 혈통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문화, 사회 각 방면에서 한일 간의 상호작용이 있었고, 그런 속에서 백제 쪽의 작용이 상대적으로 훨씬 우세했다.  고대 일본이 사실상 한국인들의 '뜻대로' 경영되었음을 입증하는 흥미로운 사실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일본'이란 국호의 기원이다. 이 국호의 채택 과정을 관찰하면, 고대 일본의 성립 및 발전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원래 국명은 왜국(倭國)이다. '왜국'이 '일본'으로 바뀐 시점은 흥미롭게도 백제 멸망 직후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편에 국호 변경의 역사적 순간이 기록돼 있다.   "(문무왕 10년) 12월, 왜국이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다. '해 뜨는 곳과 가까워서 이렇게 이름을 붙인다'고 스스로 말했다(倭國更號日本. 自言, 近日所出以爲名)."  아키히토 일왕도 인정한 것처럼, 왜국 왕실은 경제, 정치, 문화,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혈통적으로도 백제와 긴밀한 연관을 가졌다.

  이 때문에 백제-왜국의 공고한 동맹은, 660년에 의자왕이 백기를 듦으로써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식지 않았다. 일본 지배층 내에서는 어떻게든 백제를 되살려 보려는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왜국인들의 동맹정신은 백제 유민들에 대한 따뜻하고 열렬한 환영으로도 표출되었다. 그들은 백제 왕족들을 우대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백제인들을 일본열도로 불러들였다.

  백제 난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왜국인들은 많은 것들을 양보했고 군말 없이 그렇게 했다. 그들은 새 식구들에게 먹고살 터전부터 마련해 주었다. 예컨대, 덴지 4년(665년) 에는 백제난민 4백여 명에게 정착지를 제공했고, 덴지 5년(666년)에는 난민 2천여 명에게 집터를 지원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왜국인들은 관직도 내주었다. 일례로, 국호 개정 직후인 덴지 10년(671년)에는 약 70명의 백제인들에게 관직을 부여했다. 군사학에 조예가 깊은 백제인들을 가장 우대했고, 의학, 유교, 음양학에 전문성이 있는 백제인들을 그 다음으로 우대했다.

  이처럼 선진문명을 가진 백제 유민들이 왜국에 대거 유입되고 그들이 국정에 참여함에 따라, 왜국의 사회체제를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됐고, 그 결과 새로운 국호가 탄생하게 되었다. 토착민과 도래인이 동참해서 신국(新國)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본이란 국호가 창안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일본이란 국호는 백제인과 왜국인의 공동작품이지만, 그것의 채택과정에서 백제인들의 입장이 좀 더 강하게 반영됐으리라고 추론할 만한 근거가 있다. 위에서 소개했듯이, <삼국사기>에서는 '해 뜨는 곳과 가까워서' 일본이란 국호를 채택했다고 했다. 그러나 왜국인들의 눈에는 자기 나라가 '해 뜨는 곳'일 수가 없다. 왜국을 '해 뜨는 곳'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왜국 서쪽에 살던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일본이란 국호 속에는 왜국에 대한 백제 유민들의 관점과 철학이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신국의 건설과정에서 백제인들의 영향력이 매우 막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본 국호의 탄생과정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백제 유민들은 그들의 관점과 철학에 입각하여 일본열도를 새로 개척해나갔다. 그들의 조국인 백제는 비록 멸망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멸망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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