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사극 <해를 품은 달>은 왕세자 이훤의 혼례를 중심으로 가상의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다. 만약 오늘날 이런 선발대회가 열린다면, 아마 그 인기는 웬만한 스타 오디션을 능가할 것이다. 그러나 세자빈 선발에 대한 조선시대 분위기는 의외로 냉랭했다. 국혼(왕실 혼인)은 일단 피하고 봐야 한다는 것이 대세였다. 1837년 제24대 헌종의 국혼 때는 지원자가 전국적으로 12명이었고, 1882년 왕세자 이척(훗날의 순종)의 국혼 때는 25명이었다. 전국의 처녀들에게 지원을 강요했는데도, 지원자는 대개 30명을 넘지 않았다.

  신데렐라는 요정의 도움으로 하녀, 마부와 말, 마차, 구두, 드레스를 구해서 왕자의 무도회에 가까스로 참석했다. 조선시대 여성도 국혼에 참가하려면 몸종, 유모, 미용사와 가마까지 준비해야 했다.  이것은 까닥하다가는 집안 살림을 거덜 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잘못하다가는, 자식 혼수를 위해 모아둔 '정기예금'이나 '적금'까지 탕진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국혼을 기피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 같은 비용문제 때문이었다.

  많은 비용을 들이더라도 합격 가능성만 있다면 문제는 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합격자가 사전에 내정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돈 쓰고 들러리나 설 수 밖에 없었다.   어찌어찌해서 최종 합격자가 된다 해도, 이것은 자칫 재앙의 씨가 될 수도 있었다. 웬만한 가문들은 까딱 잘못하다가는 정쟁에 휩쓸려 멸문지화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권력이 없는 집안이 혹시라도 합격자를 배출했다면, 이런 가문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아야 했다. 왕실과 사돈을 맺는다는 것은 이처럼 힘겹고 무서운 일이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혼을 기피했지만, '원칙상'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2가지 성씨가 있었다. 바로 이씨와 김씨였다.   이씨는 왕실과 동성(同姓)이라는 이유로 국혼에서 아예 배제되었으며, 김씨는 음양오행 사상의 영향으로 ‘김씨는 이씨에게 해롭다’는 인식으로 배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김이라는 글자는 '금'과 같고, 이(李)라는 글자에는 목(木)이 들어 있기 때문에 김씨는 '금'에 해당하고, 이씨는 '목'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김씨의 금속 성분이 이씨의 나무 성분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김씨 여성은 이씨 왕조에게 해롭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김씨는 이씨 왕조에 해롭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김씨 처녀들은 국혼을 크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합격 가능성이 낮은지라, 국혼에 지원하라는 압력도 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조선 전기에는 제2대 정종의 부인인 정안왕후 김씨를 제외하고는 김씨 왕후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가 일대 충격을 받은 뒤부터 이 원칙은 금이 가고 말았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2년에 인목왕후(인목대비) 김씨가 왕비가 된 것을 시작해서 조선 후기에만 9명의 김씨 왕비가 등장했다. 조선 전기의 정안왕후까지 합하면 김씨 왕비는 총 10명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배출된36명의 실제 왕후 중에서 김씨가 10명으로 1위, 윤씨가 6명으로 2위였다. 민씨와 한씨가 각각 3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왕후가 될 수 없다는 김씨가 가장 많은 왕후를 배출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조선 전기만 해도 금기시되던 김씨 왕후가 조선 후기에 대거 배출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임진왜란의 충격을 거치면서 조선사회가 기존의 통념으로부터 상당부분 해방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국혼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이씨 처녀들뿐이었다. 수많은 처녀들이 되지도 않을 국혼 때문에 스트레스를 앓고 있을 때도, 이씨 처녀들은 그런 걱정 없이 '내 님은 누구일까? 어디 계실까? 무엇을 하는 님일까?' 하며 행복한 상상을 즐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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