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준호 목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4) 이것은 역사 속에 있는 우리 모든 인생이 받아야 하는 질문이다. 대답해보자. 과연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가?  그분은 한 인간에 불과한가? 물론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다윗의 자손으로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 직업을 가졌고, 희노애락, 배고픔, 목마름, 가난, 유혹, 고단한 인생의 경험, 죽음, 무덤까지 간 것이 우리와 똑같다. 그러나 같으며 동시에 우리와 너무 다르다.

 그분은 한 선생에 불과한가? 유대나라의 산헤드린공회원(국회의원)인 니고데모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요3:2) 그분의 훌륭한 가르침은 권세있는 자와 같고, 도덕적 깊이와 순결한 윤리(산상수훈)는 세계 4대 성인에 추대되기에 마땅하다. 진실로 위대한 선생이다. 그러나 단순한 선생만은 아니였다.

 그분은 한 선지자에 불과한가? 수가성의 여인은 말하기를,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9:17) 그렇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그분은 선지자이다. 그러나 선지자 이상이다. 그렇다면 그분은 누구인가? 예수님의 자기선포를 보라. ‘나는 위에서 났느니라’(요8:23)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으니라’(요8:5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요6:35) ‘내가 세상의 빛이로라’(요9:5)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요10:3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14:6)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계1:17) 모두 그분이 스스로 주장한 것이니, 둘 중에 하나다. 허황된 사기꾼이든지 스스로 선포하는 바로 그분(구세주)이든지...

 그대들은 어떻게 대답할텐가? 선한사람? 놀라운 선생? 위대한 선지자? 천사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1:2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해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이 예수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재판석에서 묻는다. ‘그리스도라 하는 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마27:22) 우리는 이 질문에 세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1) 그분을 죽일 수 있다. 그당시 그들도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러나 생명이신 그분은 죽지 않는다. 무덤이 그분을 가두지 못한다. 결국 모든 인생이 그분 앞에 선다.

 2) 그분을 미룰 수 있다. 다음에, 다 죄짓고 잘 살고 난 다음에... 천명을 상대로 ‘몇 살 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는가?’라는 <죤 모트>의 설문조사가 있다. 20세 전 548명, 30세 전 357명, 40세 전 76명, 50세 전 15명, 60세 전 3명, 70세 전 1명, 미룰수록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3) 그분을 제쳐놓을 수 있다. 그분의 가르침은 받는다. 그러나 삶속에 모셔들이기를 원치않는다. 그리스도는 원하지만 주님(내 삶의 주인)은 싫다. ‘간섭하지 마시요, 멀리 있다가 필요할 때만 오시요’ 그러나 그분이 그대의 주님이 아니라면 그대의 그리스도도 아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그분은 죄인을 찾으러 오셨고, 죄인을 대신하여 대속물로 죽으러 오셨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 우리가 구세주를 찾는게 아니다. 그분이 나같은 죄인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찾으시는 그 심정으로 오신 그분앞에 우리는 숨지말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주님의 Calling에 응답만 하면 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금요일 오전 9시경, 내대신 십자가를 지고 비아돌로로사(고난의 길)을 올라가신 예수님은 골고다(해골)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내 죄를 위해 죽었고, 내 죄에 대해서 죽었고, 내 죄 안에서 죽었다. 그리고 해골(마른 뼈다귀=우리 죄인의 실존)위에 생명의 피를 쏟으셨다. 그 십자가는 원래 흉악한 강도 <바라바>의 몫이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바라바(해골)는 살았다. 인간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는 길은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예수는 우리에게 누구인가? 둘 중의 하나이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배척하든지, 아니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영접하든지...그 대답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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