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수목드라마 <옥탑방 왕세자>는 세자빈 사망사건을 축으로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다. 세자빈 부용(정유미 분)이 어느 날 갑자기 궁궐 연못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사고사로 처리됐지만, 남편인 왕세자 이각(박유천 분)은 살인사건일 것이라고 확신,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단독 재수사를 강행했고, 이 과정에서 자객들의 추격을 받다가 절벽에서 추락했다. 그렇게 추락한 그가, 대한민국 서울의 어느 옥탑방에서 환생하게 되었다. 세자빈 의문사가 이각의 환생을 초래한 것이다.

 구체적 상황은 다르지만, 조선시대에 실제로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세자빈 사망사건이 있었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임금의 며느리이자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민회빈 강씨)이 그 주인공이다. 인조는 왜 며느리 강빈에게 사약을 내렸을까?  <옥탑방 왕세자>의 경우 세자빈의 사망 원인이 불명확했지만, 강빈 사건의 경우에는 사망 원인이 명확했다. 시아버지가 내린 사약을 먹고 강빈이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조가 사약을 내린 근거가 불명확했다. 별다른 명분이나 증거도 없이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그래서 두고두고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강빈의 불행은 소현세자의 불행으로부터 시작됐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에 패한 뒤 아버지 인조와 함께 삼전도(서울시 송파구 석촌호수)에서 굴욕의 항복의식을 올린 인물이다. 그 뒤 소현세자는 동생인 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인질답지 않게 청나라 생활에 너무나 잘 적응했다. 그는 새로운 것들을 열심히 배웠을 뿐만 아니라 조선-청나라 외교현안까지 잘 처리하여 청나라 집권층의 신뢰를 얻었다. 청나라 황제의 사냥에도 동행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이 됐다. 아들의 소식은 아버지에게 위협을 주었다. 인조는 지난날 몽골 황실의 사위가 된 고려 왕세자 왕장(훗날 충선왕)이 몽골의 지지를 바탕으로 아버지 충렬왕을 밀어내고 왕이 된 사례를 떠올렸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지지를 바탕으로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까 염려했다.

  1645년, 강빈과 소현세자는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했다. 강빈은 서른다섯, 소현세자는 서른네 살이었다. 이들의 귀국은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인조가 냉랭하게 대했던 것이다. 인조는 8년 만에 만난 아들 부부가 반갑기보다는 ‘내가 제2의 충렬왕이 될지 모른다’며 경계했다. 남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전력이 있는지라, 그는 자신도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부자간에 냉기가 도는 가운데, 소현세자는 귀국 2개월 만에 갑작스레 목숨을 잃었다. 어의는 학질에 의한 사망으로 진단했지만, 사실은 약물중독으로 죽은 것 같았다고 인조 23년 6월 27일자(1645년 7월 20일) <인조실록>은 말한다. 소현세자의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피가 철철 흘렀기 때문이다.

  소현세자의 불행은 처자식의 불행으로 이어졌다. 인조는 가장을 잃은 소현세자 가족에게 동정을 베풀지 않았다. 세자가 죽었으므로 원손(세자의 장남)인 이석철이 후계자가 되는 게 마땅했지만, 인조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차남인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런 상태에서 인조 24년 1월 3일(1646년 2월 18일), 강빈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인조가 받은 수라상에는 전복구이가 올라와 있었다. 전복을 먹던 인조는 음식이 이상하다며 갑작스레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조사 결과, 전복구이에서 독이 검출됐다. 인조는 곧바로 강빈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인조실록>의 사관(史官)조차도 터무니없는 사건이라고 비판했다. 강빈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인조는 강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강빈과 소현세자의 죽음을 발판으로 최대 이익을 본 인물은 봉림대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사망 경위가 자꾸 거론되는 것이 그에게는 두렵고도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 효종이 얼마나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황해도 관찰사 김홍욱에 대한 조치에서 잘 나타난다. 김홍욱이 강빈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상소를 올리자, 효종은 곤장을 쳐서 그를 죽여 버렸다. 누구든지 강빈 문제를 입에 담으면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인질생활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남편이 시커먼 시체로 변하고 형제들마저 유배지로 떠난 상태에서 그 자신마저 사약을 마셔야 했던 강빈. 사약 사발이 입술에 닿는 순간, 그는 세 아들이 눈에 밟혀 고통스럽고 서러웠을 것이다. 강빈은 죽어서도 분통을 다 풀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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