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에는 “스프링복”이라는 산양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을 할 때는 10마리나 20마리 정도가 한가롭게 풀을 뜯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느 때는 갑자기 수 만 마리가 되는 거대한 산양의 무리로 모습이 바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갑자기 몇 마리가 뛰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처음에 이들은 천천히 걸으면서 풀을 먹습니다. 그러나 앞에 있는 양들이 들에 있는 모든 풀을 뜯어 먹으면 뒤에 있는 양들에게 먹을 것이 남지 않습니다. 배 가 고파진 뒤에 있는 양들이 앞에 있는 양들에게 비집고 들어가려고 옆에 있는 양들을 떠다밀게 됩니다. 그 떠다미는 힘은 급속하게 앞에 있는 양들에게까지 전달이 됩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급한 걸음을 하게 되고 결국 뛰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뛰기 시작하면 뒤에서 이유도 모른 채 따라서 뛰게 됩니다. 다른 곳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던 양들이 이 모습을 보고서 자기들도 같이 뛴다는 것입니다. 뛰어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무조건 달리기만 하는 것입니다. 질주하는 양떼들 의 무리는 초원을 지나고 사막을 지납니다. 그들은 마침내 해안가에 도달을 합니다. 높은 물이 넘 실거리지만 양들의 달리기는 멈추지를 않습니다. 뒤에서 몰아붙이는 힘에 못 이겨 결국은 바다 속으로 다 들어가고 맙니다. 처음의 목적은 분명히 보다 나은 풀을 뜯기 위해서입니다. 배가 고프니까 먹기 위해서 뛰었습 니다. 남이 내 것을 다 빼앗아가니까 최소한 내 풀만큼은 얻기 위해서 뛴 것입니다. 그런데 남이 계속 뛰니까 그 애초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남이 뛰는 것을 좇아갔습니다. “더 좋은 풀이 있으니까 뛰겠지, 나도 그 풀을 먹으려면 뛰어야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는 풀에 대한 목적은 잊어버린 채 뛰기만 하는 것입니다. 목적이 풀이 아니라 뛰는 것이 되어버 렸습니다. 목적을 잃은 달리기는 결국 양들을 모두 죽음으로 내 몰게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실 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한가로이 눈앞에 있는 풀만을 뜯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민 오는 바로 그날부터 뛰기 시작 했고 그 뜀박질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게으른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 습니다. 사회 구조자체가 근면하게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웃들이 열심히 일 하니까 나도 일했습니다. 그들과 똑같이 해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고는 더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뜀박질이 단순히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남들이 집을 사니까 나도 사야 하고, 남들이 좋은 차를 사니까 나도 사야 합니다. 이웃이 좋은 가구를 들여놓으면 그것이 어느 사이엔가 내 생활의 목표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고야 맙니다. 나도 모르게 경쟁 적으로 달리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에 뛰는 것은 수단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했던 것입 니다. 그런데 이제는 뛰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도 뛰지 않으면 남에게 지는 것 같고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뛰면 남들보다 더 많은 열매를 얻을 수는 있는 것은 사실 입니다. 이웃이 부러워할 만한 성공을 거두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행복은 아닙 니다. 삶의 의미는 결코 보이는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고향인 밧단 아람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 성공을 거두기 까지 그는 밤잠을 자지 않고 뛰었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그 나라 사람들과 경쟁을 해서 이기려면 두 배, 세 배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는 20년 만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이 상태로 계속 뛰면 밧단 아람에서는 최고의 거부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20년간  열심히 뛰기만 하던 삶의 패턴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밧단 아람에서의 달리기는 그의 인생의 목 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큰 결단을 내립니다. 가나안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할아버 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약속하신 땅이 바로 가나안이었기 때문입니다. 20년 전 가나안을 떠날 때 벧엘에서 하나님에게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나를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만 하신다면 모든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에게 두겠습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야곱의 인생 가치요 의미였습니다. 그는 한 번도 그 사실을 잊 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땅은 아직도 남의 땅입니다. 가나안 족속이 주인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형 에서가 야곱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습니다. 가나안보다는 밧단 아람이 훨씬 편하고 성공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인생의 더 큰 목적을 택했습 니다. 밧단 아람에서의 삶은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뛰기만 계속 했다면 그는 더 많은 부를 쌓았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왜 뛰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표를 향해서 뛰고 있는지, 아니면 남들이 뛰니까 나도 뛰고 있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너무 뛰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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