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속담에 ‘의사와 변호사 그리고 기자를 멀리하라’ 는 말이 있다고 들었다. 풀어서 보면 의사나 변호사 및 기자들과 가까워질만한 사연이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순탄하지 못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그들과 가까워지지 않을 만큼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그만큼 건강하고 건전하고 당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다른 방향에서 풀어보면 그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 건강의 약점과 나의 파란만장한 삶의 뒷 부분과 내가 겪어온 아픔을 파헤쳐낼 수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편하게 느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여년 가까이 지나온 세월을 통하여 내가 본 우리들의 아픔과 불편함은 의사도 변호사도 기자도 아닌 절친한 친구와 형제자매였으며, 아버지 어머니의 형제자매였으며,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도 알고 있는 이웃들이었으며, 호형호제하며 무엇보다도 정직과 신뢰를 내세웠던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공인들이었다. 결코 멀리하고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내가 문제의 원인을 잘 못 볼 수도 있고, 판단이 잘 못 될 수도 있겠지만, 어떻든 우리들이 처한 대부분의 아픔이 그들과 관련되었다는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서로가 친하니까 시작은 분명 좋은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미국사회에 대한 이해의 부족, 지나친 배려, 지나친 의존, 원리원칙의 경시, 선의에 대한 오해, 부당한 기회의 남용, 합리적인 판단의 결여, 사회경험의 부족, 분명하지 않은 의사표현 등 여러가지 이유로 착각과 오해 및 불신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받는 경우로 결론 지어지는 경우을 많이 봤다. 나 자신 역시 본의와는 다르게 그런 경험이 있기에 쑥스럽다.

요즘들어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수년간 극심한 경기침체로 우리 서민들의 삶은 내일을 볼 수 없는 하루살이가 되었고, 그래도 무한대의 달러를 먹어대는 끝없는 전쟁과 당파적인 정쟁의 소용돌이는 지칠줄도 모르고 있다. 게다가 날씨까지도 경기침체의 영향을 받는지 더더욱 꽁꽁 얼어터지는 겨울이 되니 무슨 기회가 어디에 있는지 도대체 감잡을 수 없다. 한국도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떠났던 그 시절에 비하여 돌이켜보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여유롭게까지 느껴진다.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것을 믿고 싶은 희망사항인듯 하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기회도 점점 적어지는 미국에 살면서 우리 가운데는 서로 가까운 사람들에 의하여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겪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얼마 전에 법원에서 만났던 분들도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법원에 가면 항상 쌍방의 말은 너무 다르다. 한쪽 말만 듣다보면 그럴 듯 한데, 나머지 한 쪽 이야기를 들어보면 누군가 악의적인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쉽게 알게된다. 당사자들은 진실을 알고 있다. 그래도 그 진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제 3자로서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을 찾는 것은 신중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누군가 진실을 가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어느 한 쪽이 당당하게 나설 수 없는 신분의 문제가 있을 때이다.

잠시 휴정을 하는 동안 짧은 대화를 갖을 기회가 있었다. 친척간에 의하여 어려운 상황에 처한 그 분은 한인사회가 그러한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그렇지만 우리가 처한 한인사회는 어떤가? 새로운 터전을 찾아서 이곳에 오는 이민자들은 한인사회에 무엇인가 기댈 수 있는 곳이 있기를 희망한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한인사회에 그런 기대를 접은 지가 오래되지 않았는가?
법원을 나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제 이민생활 20여년을 넘보는 나도 이제는 나보다 뒤에 이민을 온 많은 사람들에게 이민선배가 되었다. 이제 누군가가 한인사회의 미흡한 역할을 탓한다면 나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나도 그 속에 묻혀서 20여년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 나도 그 동안 먹고살기에 정신이 없었으니, 그 책임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것 저것 가진 것도 없으니 우리 한인사회 잘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나 해야할까? 그나마 영어줄꽤나 읽을 수 있고 떠들 수 있으니 글 심부름과 말 심부름이나 잘하면 될까?

이제 곧 짧았던 한 해가 마무리 된다. 올 한 해 동안 만났던 그런 저런 일들로 많이 아파했던 분들을 생각해본다. 내 마음은 아프고 안타까울 뿐이지만, 당사자들의 그 불안하고,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그 마음은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그 아픔이, 그 고통이 영어로 고칠 수 있는 무엇이라면 감히 어떻게 해볼 마음이라도 있을텐데. 나로서는 오로지 기도밖에 할 게 없다. 아팠던 만큼 더 강해지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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