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TV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시청자들의 이목을 끈 것 중 하나는 천관녀와 김유신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드라마 속의 천관녀는 국가 신당에서 제사 업무를 보조하는 무녀(신녀)였다. 소년 김유신은 시장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났고, 김유신의 적극적인 구애 끝에 둘의 사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천관녀가 칼을 맞을 위기에 처한 김유신을 구하려다가 도리어 그 칼에 목숨을 잃으면서, 무녀와 김유신의 사랑은 '강제종료'되고 말았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열일곱 살 된 화랑 김유신은 산속에서 수행하던 중에 신비한 노인을 만나, 그로부터 방술 즉 신선의 술법을 배웠다. 이듬해인 열여덟 살에 그는 산에서 향을 피우며 기도하던 중에 '천관' 즉 하늘신으로부터 빛의 세례를 받았다.
중국 도교에서도 천관은 천신(天神)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런 예들을 보면, 천관녀는 하늘신을 모시는 여성이란 판단이 도출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극 작가들이 천관녀를 무녀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사람에 관한 기록을 읽어 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고려시대 기록인 <파한집>이나 조선시대 기록인 <동국여지승람> 및 <낙하생집> 등에는 김유신과 천관녀의 러브스토리가 등장한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소년 김유신은 어머니 김만명(만명 부인)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서민 친구들과 교제했다. 백정의 아들과도 사귈 정도로 김유신은 신분의 고하를 불문하고 우정을 나누었다. 그는 서민 친구들과 어울려 기생집에 다니면서 기생과도 친분을 쌓아, 좋아하는 기생의 집에서 밤을 새기도 했다. 
이때 김유신이 사귄 기생은 천관녀란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 후기 학자인 이학규의 저서인 <낙하생집>에 따르면, 이 여성의 신분은 여예(女隸)였다. 노예의 '예'자가 붙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여예는 여자노비 혹은 여종이었다. 이 여성은 기생집에서 일하는 노비였던 것이다.
아들이 기생집 여성과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만명은 아들을 불러 놓고 울면서 타일렀고, 어머니의 눈물에 가슴이 울컥한 김유신은 다시는 기생을 만나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김유신은 기생을 잊겠다고 선언했지만, 김유신이 타고 다니는 말은 기생을 잊지 못했다. 얼마 뒤, 주인의 변심을 알 리 없는 그의 말은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주인을 기생집 앞에 내려다놓는 충심을 과시했다. 김유신이 얼마나 자주 그곳을 방문했을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한동안 김유신을 그리워한 기생은 눈물을 흘리며 맞이하러 나왔다. 하지만, 김유신은 그 순간에 어머니의 눈물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그는 '좋은 아들'이었지만, '나쁜 남자'였다. 김유신은 칼을 들어 말의 목을 내리치고는 얼른 기생집을 떠났다.
이 장면이 기생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 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기생이 안 보는 데서 말을 죽여도 됐을 텐데, 김유신은 좀 곱지 않은 방법으로 기생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 기생의 집은 훗날 천관사란 종교 건물이 되었다. 원한을 품은 기생의 혼을 달래는 장소가 된 것이다. 김유신이 나중에 이 건물을 지었다는 말이 있고, 적어도 고려시대 중기까지는 이 장소가 존재했다고 한다.
천관사(寺)란 표현을 근거로 이곳을 불교 사찰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이곳이 천관사라 불리게 된 것은 김유신과 사귄 기생의 이름이 천관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관녀'는 직업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인명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천관 즉 하늘신을 모시는 여성이라는 의미에서 천관녀라고 부른 게 아니라, '천관이란 이름을 가진 여성'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왕의 꿈>을 포함한 사극들이 천관녀를 무녀로 단정하는 것은 성급하다. <낙하생집> 같은 문헌을 보더라도, 그는 무녀와는 무관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는 기생집에서 근무하는 여자노비였다. 그러므로 김유신이 현직 무녀와 더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했다는 사극의 스토리는 역사적 근거가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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