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패자인 장옥정(장희빈)은 항상 인현왕후의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장옥정이 아직도 한양 한복판에서 힘을 과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한국 세무행정이 장옥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신청사 공사가 막바지 단계에 있는 종로구 낙원동 58번지 8호 부지는 2011년 이전까지 종로세무서 청사로 사용되었고, 종로세무서 청사로 사용되기 전에는 서울지방국세청 청사와 국세청 청사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한국 세무행정 역사가 살아있는 현장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은 한국 세무행정 못지않게 '죽은 장옥정'과 가장 관련이 깊은 장소다.
그렇다면 이곳에 장옥정의 무덤이 있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옥정의 무덤인 대빈묘는 그가 죽은 1701년 이래로 경기도 양주 및 광주를 거쳐 현재는 고양시 서오릉 경내에 있다. 따라서 낙원동 58-8은 장옥정의 무덤과는 상관없는 곳이다.

   현대인들은 죽은 사람과 관련하여 그의 무덤을 가장 중시한다. 하지만, 20세기 이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무덤보다는 사당을 더 중시했다. 사당에는 죽은 자의 영혼이라도 있지만, 무덤에는 껍데기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장옥정의 사당은 어디에 있을까? 조선시대에 그의 사당인 대빈궁이 세워진 곳은 두 곳이다. 하나는 위에서 소개한 낙원동 부지였고, 또 하나는 지금의 청와대 경내다. 청와대 경내에는, 왕을 낳았지만 왕비로 인정받지 못한 여인들의 사당인 칠궁이 조성되어 있다. 이 칠궁 속에 대빈궁도 포함되어 있다.
대빈궁이 최종적으로 안착한 곳은 청와대 경내의 칠궁이지만, 죽은 장옥정에게 훨씬 더 의미가 큰 곳은 낙원동 부지였다. 낙원동 부지에 대빈궁이 조성된 과정을 살펴보면 그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장옥정이 죽은 1701년 이후, 왕실에서는 오래도록 그의 사당을 세워주지 않았다. 왕실에서는 그럴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장옥정이 사약을 마시고 죽은 데에다가, 그를 돕는 정치세력인 남인당이 정계에서 사실상 축출됐기 때문에 사당을 만들어줄 만한 분위기도 조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죽었든지 간에 시신을 묻을 장소만큼은 필요했다. 그래서 대빈묘라는 무덤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러면서도 영혼을 모실 사당을 지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장옥정의 무덤은 만들어주면서도 사당은 안 만들어준 것이다.

   장옥정의 영혼이 사당을 갖게 된 것은 죽은 지 21년 뒤인 1722년이었다. 그때 장옥정의 사당인 대빈궁이 한성부 중부 경행방에 세워졌다. 지금의 낙원동 부지에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21년 만에 사당이 세워진 곳이니, 죽은 장옥정에게 이곳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낙원동 부지가 중요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부지에 대빈궁을 세운 사람이 장옥정의 아들인 경종 임금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빈궁이 세워진 시점인 1722년은 경종이 왕이 된 지 2년 뒤였다.
<경종실록>에 수록된 '경종대왕 묘지문'에 따르면, 대빈궁은 경종의 왕명에 의해 세워졌다. 만약 장옥정의 아들이 왕이 되지 않았다면, 왕실이나 조정에서는 장옥정의 사당을 결코 세워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낙원동 대빈궁은 왕실에서 최초로 세운 장옥정 사당일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이 어렵사리 세운 사당이었다. 고종 임금 때인 1870년에 대빈궁이 지금의 청와대 경내로 옮겨지긴 했지만, 죽은 장옥정한테는 청와대 대빈궁보다는 낙원동 대빈궁이 훨씬 더 뜻깊은 장소였다.
그런데 그런 장소에 국세청, 서울지방국세청, 종로세무서 등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 그리고 조만간 종로세무서가 그곳으로 돌아간다. 이 정도니, 주요 권력기관인 세무당국이 장옥정의 품 안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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