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어머니는 아버지가 월급을 받는 날이면 항상 우체국 계좌로 한 달 생활비를 보내주셨다. 항상 모자랐던 용돈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나의 월급보다는 알차게 사용했던 것 같다.
학교 내에는 은행보다 우체국 거래가 활발했었는데, 어느 날 우체국 창구 옆에 무의탁 노인 돕기, 고아원, 맹아학교 등 불우이웃돕기 계좌들이 적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후로 우체국을 드나들 때마다 그 메모가 눈에띄었다. 며칠 생각 끝에 나는 무의탁 노인을 돕고 있는 비영리 단체 하나를 골랐고, 매달 30일 2만원씩 자동이체를 하기로 신청했다. 한달 기숙사비가 8만원이었던 당시 2만원은 나에게 큰 돈이었다. 매달 말일이 되면 항상 용돈이 부족해서 전전긍긍하면서 그 2만원이 얼마나 아쉬웠는지 약간의 후회를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만원 기부를 3년을 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겼다. 이 단체에서 자동이체 금액을 최하 2만5천원으로 올리겠다고 통보를 해온 것이다.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누구를 돕는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함은 물론이고 특히 기부 액수는 도와주려는 이의 마음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제도적으로 최소 기부 금액을 못박고 그 이하는 더 이상 받지 않는다는 것이 납득이 되질 않았다. 이 단체의 행태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3년이나 보내오던 거금 2만원을 그만 보내기로 결정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성금 금액을 강요한다는 것이 쉽게 용서가 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 더욱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내가 3년동안 용돈을 아껴가며 성금을 보낸 복지시설의 경영진들이 공금을 횡령하고 종적을 감춰버렸다는 뉴스가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이다. 나의 피 같은 용돈이 사기꾼들의 주머니만 채워준 꼴이 되고 보니 나는 더 이상 이웃을 돕는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너무 아까워서 고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생애 첫 불우이웃돕기는 이렇게 사기극으로 끝났다.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잠실에서 지하철을 갈아타야 했다. 그곳 지하도에는 항상 앵벌이를 하는 아저씨가 있었다. 잔돈이 남으면 간혹 소쿠리에 넣어주기도 했는데 그 날 따라 학교를 늦게 마쳐서 배가 무척 고팠다. 하지만 주머니 속에는 회수권만 달랑 들어 있었기 때문에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즐비한 지하도 식당가를 그냥 지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때 한식당에서 정말 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바로 그 거지 아저씨였다. 밥을 먹고 계산을 하고 나가는데 그의 주머니 속을 가득 채운 천원짜리 지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오뎅 한꼬치 사먹을 돈도 없는데, 거지가 나보다 돈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이후로 그 아저씨에게 더 이상 잔돈을 보태주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 좋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부 행위에 대한 배신감을 가진 채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요즘, 나는 해묵은 나의 고정관념을 부수는 새로운 무언가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나만의 일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한인 커뮤니티가 커지면서 이곳저곳 행사가 많아졌고, 그만큼 후원도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한 사람이나 한 단체가 모든 행사비를 지원한다는 것은 힘든 일일뿐더러, 커뮤니티를 위한 행사의 의도에 비추어봐도 여러 사람들의 십시일반 후원이 꼭 필요하다. 최근 우리 커뮤니티가 일궈낸 가장 큰 성과는 안나의 집이었다. 수백명에 이르는 후원자들의 힘으로 한인 양로원이 10주년을 넘긴데 이어 새로운 보금자리까지 마련한 일은 한인 커뮤니티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랜 세월 페루 사역을 해온 김한희 선교센터의 활동도 칭찬할 만하다. 페루의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전한지가 벌써 15년이 넘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빈민촌에 버려졌던 아이들 중에는 이제 신학교를 다니거나, 자기보다 못한 아이들을 돕는 예수님의 아이들로 거듭났다. 모두들 먹고 살기 바빠 자기 자식들 돌보기도 힘들다고 징징대는데, 딱한 어린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사랑과 관심의 손길을 보내는 이들이야말로 지구촌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또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면 곳곳에 삶의 후원자들이 숨어있다. 매주 어김없이 노숙자들 돕고 있는 봉사단체들, 명절이 되면 독거노인들에게 쌀을 나눠주는 업체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라면을 기증하는 익명의 후원자들, 특히 포커스 청소년 문화축제 행사를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주는 후원자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이야말로 커뮤니티가 힘들 때 보듬어주고, 어려울 때 짠하고서 나타나는 진정한 한인 사회의 태권브이가 아닐까 싶다. 물론 봉사와 후원의 참뜻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열심히 봉사해온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다 보면 계속하게 된다”고 말이다.
이번 청소년 문화축제에는 모두 22팀이 등록을 했다. 이번 주 예선을 통해 본선 진출자가 가려지겠지만 이들에게는 응원의 박수도 큰 후원이 될 것이다. 6월1일 토요일에 열리는 본선에는 동포사회의 모든 부모, 형제, 자매가 관객으로 참석해 참가자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길 바란다. 그들에게 감동의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 또한 우리 기성세대가 해야할 일이다. 우리 세대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은 아이들이라면, 반드시 자신들이 받은 것을 기억하며, 성장한 후에도 어린 동생들을 위해, 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커뮤니티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이들을 진정한 태권v의 후예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기성세대의 솔선수범이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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