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의 풍흉과 직결된 숭례문

   숭례문(남대문)이 5년 만에 복원됐다. 오늘날 우리는 숭례문의 소실과 복원을 보며 울고 웃었다. 그런데 숭례문에 대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애착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는 숭례문의 상태가 농업의 풍흉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농업이 최대 산업이었던 시대에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 것(가뭄)과 하늘에서 비가 너무 많이 내리는 것(장마)이 가장 큰 문제였다. 조선시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전의 왕조들도 그랬지만, 이런 경우에 대한 조선왕조의 대책 중 하나는 도성의 숭례문과 숙정문(또는 숙청문, 북대문)을 닫거나 여는 것이었다. 
가뭄 때는 숭례문을 폐쇄하고 숙정문을 열었다. 이 점은 왕조실록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세종실록>에 따르면, 음력으로 세종 10년 4월 23일(양력 1428년 5월 7일) 조정에서는 가뭄이 시작됐다는 이유로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다.

   반면 장마 때는 정반대로 했다. 이번에는 숭례문을 열고 숙정문을 폐쇄했다. 명종 12년에는 음력 6월 24일(양력 7월 19일) 이전의 어느 시점부터 가뭄이 시작됐다. 가뭄이 끝나지 않자, 조정에서는 음력 6월 24일 직후의 어느 시점에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다. 이런 상태에서 가뭄이 끝나고 이번에는 장마가 시작됐다. 장마 피해가 커지자, 예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책을 건의했다.
"지금 가뭄 끝에 장마가 개지 않아서, 이익 없이 손해만 늘고 있습니다. 전례에 따라 숙정문을 닫고 숭례문을 여실 것을 요청합니다."

   이 건의가 주상(왕의 공식 명칭)의 재가를 얻음에 따라, 약 3주간 폐쇄됐던 숭례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숙정문이 폐쇄됐다. 이처럼 가뭄과 장마에 따라 숭례문과 숙정문이 정반대 상태로 바뀌었다.
그럼, 조선을 포함한 역대 왕조가 가뭄과 장마 때마다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거나 혹은 숭례문을 열고 숙정문을 닫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명종실록>에 실린 예조의 건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뭄이 들면 남대문을 닫고 북대문을 열며, 가죽으로 만든 북을 치지 못하게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양의 기운을 억제하고 음의 기운을 억누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땅이 마르는 가뭄 때는 양의 기운을 억제하고자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연다고 했다. 이것은 장마 때는 양의 기운을 늘리고자 숭례문을 열고 숙정문을 닫았음을 의미한다. 옛날 사람들은 음양의 기운을 조절하여 가뭄과 흉년에 대처할 목적으로 숭례문과 숙정문을 열거나 닫았던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남쪽의 숭례문에서 양의 기운이 들어오고 북쪽의 숙정문에서 음의 기운이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의 기운이 넘치는 가뭄 때는, 양의 기운을 줄이고 음의 기운을 늘리고자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던 것이다. 반대로 음의 기운이 넘치는 장마 때는, 양의 기운을 늘리고 음의 기운을 줄이고자 숭례문을 열고 숙정문을 닫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숭례문, 숙정문을 닫는다 해도 음양의 기운이 두 대문 위의 창공을 통해 한양 도성에 들어온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가뭄에 대처할 목적으로 굳이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여는 미신적 행위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는 가뭄이나 장마 대책으로 단순히 대문만 여닫은 게 아니었다. 천재지변을 타개하기 위한 현실적 대책을 강구하고 이재민 대책을 세웠음은 물론이다.
대문을 여닫은 것은, 천재지변을 극복하기 위해 소소한 일에서까지 국가가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정신의 표현이었다. 민심이 이반되기 쉬운 가뭄과 장마 때에 국가가 이처럼 작은 일에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면, 국가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숭례문과 숙정문을 여닫은 것은 조선왕조가 미신을 숭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천재지변 해결에 바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이해하는 게 훨씬 더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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