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청와대 전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으로 떠들썩하다. 요직에 있는 사람이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라는 중차대한 시기에 여성 인턴과 술을 마시고 성추행 사건에 연루됐다는 것 자체가 개탄할 일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기형적으로 성장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대변한다. 대기업 임원이 저지른 비행기 내 라면 사건이라든지, 유명 기업들이 힘없는 대리점들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갑을 관계, 며칠 전 논란 끝에 최초로 부부간에도 강간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대법원의 판결 소식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들이 별개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 사회의 성숙되지 못한 인간관계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강요하는 남편이나, 성추문 사건에 연루된 저명한 남성들의 공통점은 나르시시즘(자기애)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외견상으로는 자기주장과 자존감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면은 정반대다. 진정한 자존감이 그리 높지 않기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진정한 자존감이 있다면 상대로부터 이해를 구하고, 자발적인 동참을 유도하는 게 맞다. 갑을관계의 착취도, 중대사를 술에 좌우하면서 수렁에 빠뜨리는 짓도 하지 않는다.

   밑바닥의 자존감이 허약하다보니, 상대가 거절하면 몹시 취약한 반응이 나온다. ‘감히 내가 누군데,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느냐’는 거친 반응이다. 이는 ‘찌질이’들의 단골 레퍼토리다. 진정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히려 겸손해진다. 갑들의 횡포도 바로 이런 대우받고자 하는 욕구, 상대를 한없이 굴복시키려는 수직관계의 집착에서 기인한다. 인간관계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감정인 성(性) 문제를 수직적 관점에서 강조하면 이런 비이성적 폭력과 갈등이 많이 터진다.
그런데 최근의 현실이 무엇보다 서글픈 것은, 그 사건 배경에 우리 사회와 개인의 자존감과 인격의 취약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각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하긴 무리다. 이미 다른 선진문화에서는 부부간 강간이 인간 존엄성을 해치고 개인의 선택권을 침해하는 명백한 범죄라고 보고 있지만, 우리는 이를 두고 여태 왈가왈부했고, 이제 겨우 첫 판결을 얻었을 뿐이다. 그만큼 인간관계에 있어 폭력과 횡포에 익숙하고, 피해자의 입장을 부정하는 미성숙함이 습관화돼 있다.
이런 미성숙함의 기저에는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과 전쟁을 겪어왔고, 지금도 전쟁의 위협 속에 사는 우리 문화의 정서적 상처가 있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위협과 폭력에 워낙 많이 노출된 우리는 폭력에 대한 참을성이 기본적으로 워낙 높아서 학교폭력이나 자살, 가정폭력이나 부부강간, 갑의 횡포 정도의 폭력은 폭력 축에도 끼지 못하는 식이 되어버렸다.
인간관계는 수평적이어야지 수직관계에 사로잡히면 상처받고 피해받는 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도무지 피해자의 입장이나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채 ‘뭐 그까짓 일에 과민반응을 보이느냐’는 시각을 갖기 쉽다. 이는 참으로 병든 생각이다. 이제 우리도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지키고,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리모델링을 시작할 때가 됐다. 이런 노력을 게을리하면 개인도 국민정서도 피폐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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