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칼과 꽃>은 연개소문 시대가 배경으로, 두 연인의 사랑과 복수를 통해 고구려 말기의 역사를 조명하는 드라마다. 지금까지 방영분에서 강경론자인 연개소문(최민수 분)은 당나라와 정면으로 부딪힐 것을 주장하는 반면, 온건론자인 영류태왕은 당나라와 평화적 관계를 갖기를 희망하며 두 사람의 대결이 한층 더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한나라를 계승하여 통일 중국을 지배하던 후한이 약해지면서, 중국은 3세기부터 위, 촉, 오 삼국으로 분열됐다. 진나라(진시황의 진나라와 다름)에 의해 삼국이 통일됐지만, 4세기부터 중국 위쪽 및 왼쪽의 5대 유목민족이 북중국을 차지하면서 기존의 중국 한족은 남중국으로 밀려갔다. 중국 주변의 5대 유목민족이 북중국에 들어가 16개 왕조를 건설하고 한족이 월족(베트남족의 조상)을 몰아내고 남중국을 지배한 이 시기를 5호 16국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에는 중국대륙의 분열이 매우 극심했다.
고구려의 급성장은 이 같은 중국의 분열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고구려의 대약진은 후한이 약화된 때부터 5호 16국 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계속됐다. 중국의 분열이 최고조가 된 시점에서 고구려가 만주 전역을 지배하고 또 이것을 기반으로 중국을 위협한 것이다.

   이 시대에 고구려의 국가전략은 서진(西進)전략이었다. 남쪽의 한반도보다는 서쪽의 중국으로 진출하는 것이 국가적 목표였다.
그런데 5세기 초반부터 5호 16국 시대의 분열이 수습되기 시작했다. 이 상태에서 북중국 왕조와 남중국 왕조가 중국대륙 지배자의 정통성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남북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구려가 중국 진출에 성공할 가능성은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이런 상태에서 백제, 가야, 신라의 경제?군사적 역량이 커지자, 고구려는 한반도 쪽에 좀더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 쪽과 한반도 쪽에 거의 대등한 수준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양쪽을 상대로 동시에 이기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 역량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집중해야 했다.
고구려가 내린 선택은, 중국과의 관계를 현상유지 차원에서 묶어두고 한반도 쪽에 좀 더 역량을 쏟아 붓기로 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서진전략을 포기하고 남진전략으로 선회한 것이다.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태왕이 만주에서 한반도로 도읍을 옮긴 사건인 평양 천도(427년)는 그런 배경의 산물이었다. 이후 고구려는 한반도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 상대적으로 더 집중했다.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7세기 초반까지 이것이 대외전략이었다.

   그런데 장수태왕의 평양 천도 이래 약 200년간 유지된 남진전략을 뒤흔든 이가 바로 연개소문이었다. 그는 남북조 시대의 분열을 수습하고 통일 중국을 건설한 당나라에 맞서 국가를 지키려면 남진전략을 폐기하고 광개토태왕 때의 서진전략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가 더 이상의 팽창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연개소문도 전략 변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당나라는 자국의 지방행정구역인 도호부나 도독부에 편입될 것을 이웃나라들에게 요구했다.
오만한 당나라를 놔두고 남진전략을 계속 고수하면 고구려의 서부 방어선이 뚫릴 수 있으므로 200년 전의 서진전략을 부활시켜 중국과 정면승부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 연개소문의 판단이었다.
연개소문에 의해 쫓겨나기 이전의 영류태왕은 기존의 남진전략을 고수했다. 따라서 연개소문과 영류태왕의 갈등은 <칼과 꽃>에서처럼 강경론 대 온건론의 대립이 아니라, 실은 서진전략 대 남진전략의 대립이었다. 연개소문은 중국을 치는 데 집중하자는 쪽이고, 영류태왕은 백제, 신라를 제압하는 데 집중하자는 쪽이었던 것이다.
연개소문의 서진전략은 장수태왕 이래의 국가전략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는 광개토태왕 시대로 되돌아가 중국식 세계화를 타도하고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부활시키고자 했다. <삼국사기>에서는 그를 왕을 배신한 반역자 정도로 묘사했지만, 그런 시각으로는 연개소문의 진면모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연개소문은 그보다는 훨씬 더 큰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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