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의 유명한 산, 융프라우를 오르기 위해서는 산악열차가 시작되는 인터라켄이라는 도시를 가야 한다. 그래서 인터라켄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하루를 묵고, 새벽에 산악열차를 타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이 인터라켄까지 가려면 조금 복잡하다. 한국의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거기까지 들어가는 기차는 하루에 세 대 정도 있었는데, 이 기차를 놓치면 다음날로 일정을 미뤄야 한다. 그래서 밥 때도 놓치면서 당일에 도착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고생 끝에 인터라켄에 도착한 시각은 밤10가 다 되어서였다. 통나무 오두막집 같이 생긴 숙소를 잡았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어찌나 배가 고픈지 잠이 오질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취사장 앞을 거닐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한국 대학생들이 라면을 끓여먹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반가운 광경이었지만 선뜻 아는 척 하기가 민망해 주위만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명이 라면 그릇을 내밀었다. 반가워 얼른 그릇을 받고 합석했다. 고추장에 비빈 밥 한 그릇도 선뜻 내주었다. 그리고는 그들은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가니 필요 없다면서 남은 고추장과 김을 건넸다. 일주일 동안의 든든한 양식이 생긴 셈이다.

    취리히에 도착했을 때도 해가 지고 있었다. 숙소를 정하지 못하고 기차역 앞의 큰 길을 따라 한참을 걷고 있는데, 현란한 불빛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불빛 쪽으로 방향을 잡아 다가가서 보니 밤새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잠 잘 곳도 마땅치 않았는데 잘 됐다 싶어 놀이공원 앞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축제 덕에 노숙자들과 함께 지내지 않게 되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그런데 새벽 3시쯤이 지나서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빨리 날이 밝아 스위스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아직 반 나절이 남았다. 뭐라도 사먹고 싶었지만 그나마 환전한 스위스 프랑이 다 떨어졌다. 객지에서 돈 없고, 배고프니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벤치에서 일어나 무작정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기차역 앞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얼마 전 제네바에서 만난 한국인 노부부였다. 근처 호텔에서 자다가 일찍 잠이 깨어 산책을 나왔다고 했다. 역전 앞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햄버거와 커피 한 잔을 사주었다. 환전한 돈을 다 써버렸다고 하니까 자신들이 며칠 동안 모아둔 스위스 동전을 한 꾸러미 꺼내 주었다. 그 부부는 그날 아침 프랑스로 간다면서 더 이상 스위스 동전이 필요 없다고 했다. 한화로 약 3만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돈으로 점심과 간단한 음료수, 그리고 기념 엽서 서너 장을 살 수가 있었다. 이들은 단지 필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있는 세렝게티 국립공원를 갔을 때도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에피소드가 있다. 각국에서 모인 열 두 명의 대원들이 트럭을 타고 세렝게티를 둘러보러 나갔다. 첫 날에는 코끼리와 물소, 각종 동물들이 떼지어 다니는 그런 웅장한 장면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아쉽게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탐사 첫날 저녁부터 필자는 심한 오한과 함께 구토 증상을 보여, 이틀 동안 숙소에 누워 있었다. 먼 이국 땅에서 아파서 혼자 쓸쓸히 누워있자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괜한 고생을 사서 한다는 후회도 들었다. 그리고 열만 떨어지면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잠이 들다 깨다를 되풀이했다. 그 이튿날, 한국에서 온 한 사람이 원정대에 합류했다. 자신이 가지고 온 한국 해열제와 감기약을 주었다. 열흘 일정으로 왔는데, 절반 이상을 앓아 누워있어 시간도 아깝고 답답했다. 하지만 간호해주고 걱정해주는 동료가 있어서 위로가 됐다.

    필자는 대학시절, 틈만 나면 배낭을 메고 세계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녔다. 누구와 스케줄을 맞춰 여행하는 것이 싫어서 늘 혼자 다녔다. 혼자 다녔기 때문에 어쩌면 동포들의 따스한 마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돈도 떨어지고 몸도 지쳐 있을 때가 많았지만, ‘역시 집 떠나면 도와줄 사람이 동포들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국인들에 대한 믿음을 가진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민을 올 때도 ‘외국에도 한국사람들은 많을 테니 동포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왔다. 내 기대대로 지금껏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가끔은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일도 동포 때문이고, 울게 만드는 것 또한 동포사회인 현실을 보면서 차라리 한인 사회를 떠나는 편이 낫다는 결정을 내린 이들을 본적도 있다. 그러나 먼 이국 땅에서 이일 저 일을 겪으면서 그래도 역시, 한국사람이 최고라는 생각을 했기에 지금껏 살만했다. 전화비가 잘못 나왔을 때도, 위송방송을 연결할 때도, 집을 살 때도, 융자를 받을 때도,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을 때도 곳곳에 한국인이 있었기에 이민 생활이 편했다. 

    필자는 이제 미국에 온 지 12년이 됐다. 그 사이 두 아들이 태어났고, 포커스 신문사를 창간했다. 이번 달에 12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 네 식구가 한국에 간다. 덕분에 업소록 광고주 분들만 힘들었다. 급한 일은 마치고 가려니 확인 작업을 여간 바삐 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어찌나 협조들을 잘 해주시는지, 10년 넘어 처음 가는 고향길이라고 용돈까지 챙겨준 분도 있다. 덕분에 마음 편하게 한국을 갔다 올 수 있게 됐다. 이렇게 든든한 후원자들이 있어 한국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베푼 것에 비해 받은 것이 더 많은 시간이었다. 스위스에서 만난 한국 청년들, 노부부,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만남 원정팀, 그리고 이곳 덴버에서 만난 지인들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앞으로 포커스도 7주년을 맞은 지금까지 받은 사랑을 바탕으로 덴버 교민들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좀더 정진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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