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콘서트를 보러 갔다 왔다. 10대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창원공설운동장을 가득 메운 중장노년층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반짝이는 형광빛 머리띠를 하고 영원한 오빠라고 씌여진 피켓을 흔들면서 공연 내내 열광했다. 마치 본인들의 인생 중 가장 열정적이었던 한 때를 기억하면서 말이다.
한국에 온지 일주일이 지나 가족 사진을 촬영했다. 우리의 마지막 가족 사진은 필자와 남편이 미국에 들어오기 바로 전에 찍었다. 그 사이 필자의 아들 둘과 조카 둘이 늘어나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를 실감하게 한다. 옛날에 사진관에서 가족 사진을 찍었을 때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으려나 싶어 형식적인 포즈를 취해가면서 건성으로 촬영에 임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 가족사진이 힘든 이민생할에서 든든한 안식처가 되어줄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이번에 우리 17명의 식구들은 성심 성의껏 촬영에 임했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니 미국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가 생각났다. 시베리아의 허허벌판에 남편과 필자만 덩그러니 떨어진 느낌이었다. 크레딧이 없다보니 자동차를 구입하기 힘들어 버스를 세번씩이나 갈아타며 학교를 다녀야 했고,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집에 올 때는 으레 마켓에서 장을 본 비닐봉지가 양손 가득 들려있었다. 그나마도 집까지 가는 거리가 멀어서 무거울까봐 많이 사지도 못했다. 그리고 미국에 온지 2년 만에 방 한칸짜리 아파트에서 첫째를 낳았다. 하지만 학생이었던 우리는 큰 아이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바꾸어야 했다. 안 그래도 부족했던 생활비를 학비에 모두 털어 넣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신분을 해결할 수 있는 직장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얻은 직장이 한국일보 신문사였다. 영주권 스폰서를 해 줄 수 있다는 말에 우리는 단숨에 시애틀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덴버로 이사를 왔다. 큰 아이가 태어난 지 3개월만의 일이다. 하지만 제왕절개 수술도 했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동병원에 입원한 후라 정신적, 경제적으로 그리 편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봉에도 불구하고 3년을 열심히 일했다. 남편도 3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콜로라도 스프링스로 출퇴근을 했고, 난 아이를 맡겨놓고 낮에는 광고 영업을, 밤에는 기사작성을, 주말에는 행사취재를, 업소록 발행시에는 사무실에 혼자 앉아 밤을 샌 적도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지만 결국 나는 신분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일보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 전 시카고 한국일보 사장께서 도와주셔서 포커스 신문사를 창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포커스 신문사를 창간한 초창기에는 페이먼트 할 돈이 없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워 집은 숏세일로 처분해야 했고 차도 팔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변호사를 잘못 고용해 이민국으로부터 영주권이 거부되었다는 편지까지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시애틀에서 큰 아이를 낳았을 때는 학생이어서 저소득층 혜택이라도 받을 수 있었지만, 작은 아이는 상황이 달랐다. 별로 큰 수입도 없었지만 영주권 수속 때문에 실제보다 세금보고를 많이 한 탓에 더 이상 저소득층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이렇게 사면초가의 세월을 7년 보냈다. 그런데 막막한 상황에 봉착한 우리에게 희망이 찾아왔다. 오래 전 한국일보에 입사하기 전 인연을 맺었던 시카고의 변호사와 연락이 닿아 비자 만료일 10개월을 앞두고 영주권 수속을 다시 하게 되었고, 서류를 넣은 지 5개월 만에 기적적으로 영주권을 받았다. 신문사도 창간한지 3년이 지나면서 흑자로 돌아섰고, 지금은 웹사이트, 전자신문, 문화센터까지 운영하면서 콜로라도 한인신문 역사상 최다 페이지를 인쇄할 정도로 탄탄한 신문사로 성장했다. 때맞춰 남편의 비즈니스 또한 성공가도의 물꼬가 텄다. 지금 필자의 옆에는 늘 관심을 가져주는 독자들과 알아서 척척 일해주는 직원들, 늘 걱정해주는 지인들이 생겼다. 그리고 멋진 집과 좋은 차도 가지게 되었다. “이만큼 행복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고 싶은 지금, 필자는 12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형제들은 필자의 가족이 언젠가 한국을 방문하면 쓰기 위해 지난 5년간 매달 조금씩 돈을 모았다고 했다. 그래서 언니는 3백만원이 들어있는 가족카드를 엄마에게 건네주며 필자가 한국에 있을 동안 밥값을 낼 때 이 카드를 사용하라고 했단다. 이 외에도 경주 1박2일, 거제도 1박2일, 서울 및 용인 2박3일, 제주도 2박3일 등의 일정에 맞춰 비행기 및 호텔, 각종 놀이시설 자유이용권, 건강검진권, 조용필 콘서트 티켓까지 모두 준비해두었다. 엄마, 아빠는 우리 네 식구가 한국에서 입을 속옷과 겉옷까지 모두 세탁해 준비해 두셨다.
잠잘 시간만 되면 아빠네 집 전화기엔 불이 난다. 오빠네에서, 언니네에서, 동생네에서 잘 자라는 굿나잇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지난밤 모두 같이 자고 조금 전에 헤어졌는데도 말이다. 오늘도 형제들은 필자가 귀국하기 전까지 자신들의 집에서 하룻밤씩은 더 자야 한다며 나를 조르고 있다. 엄마는 오늘 새벽 이 칼럼을 적기 위해 책상에 앉아 있는 필자에게 다가와 혹시라도 발이 시릴까 봐 양말을 신겨주었다. 한국의 겉모습은 너무나 많이 변했지만, 가족들의 마음은 더 많이 끈끈해진 것 같아 행복하다.
힘들었던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난다. 모처럼만에 가져 보는 이런 행복한 시간들이 필자에게는 앞으로의 또다른 12년을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리라 믿는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치고 힘들 때 한국에 있는 내 가족들의 지극한 사랑이 나를 버티게 해 줄 것이다.
조용필 콘서트장에서 모두가 열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옛날 자신의 추억을 더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필자 또한 다음달 초 미국으로 돌아가면 한국에서의 추억을 더욱 값지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신발끈 단단히 묶고 더 힘껏 도약할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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