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 주간에 딸네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사위의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어, 이제까지 논문 때문에 가보지 못했던 ‘그랜드 캐년’과 ‘세도나’를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지 3년 6개월이 된 손녀의 재롱에 흠뻑 취한 채 장엄한 자연경관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특히 추수감사절 다음날이 제가 결혼한 지 33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이번 여행은 저에게 더욱 의미가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이렇게 복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라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손녀에게는 많은 장난감이 있습니다. 큰 침대도 있습니다. 자기 방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죽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공평하신가?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 설교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설교하기에는 부담이 됩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제 자신이 납득할 정도는 되어야 설교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깊이 묵상하다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불공평하게 만드신 의도가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흐름’이었습니다. 흘러야 살 수 있습니다. 즉 ‘흐름’은 ‘생명’입니다. 물이 고이면 썩어버립니다. 피도 흐르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돈도 흘러야 경제가 살게 됩니다. 흐르기 위해서는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있어야 합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면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가 되면 죽게 됩니다.
그런데 죄악성을 가진 인간들은 흘러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IMF 때 이자율이 약 18%이었습니다. 높은 이자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부자로부터 가난한 사람에게 돈이 흘러야 자연스러운 흐름인데 세상은 반대로 돈이 역류하기 때문에 사회문제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공평을 없애기 위해 공산주의 이론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공평은 숫자적인 공평이며 비교를 통한 공평입니다. 이러한 공평은 실현될 수도 없고 실현이 된다 해도 좋은 세상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두 딸이 있습니다. 딸들이 어렸을 때 서로 엄마 옆에 누워 자기를 원했습니다. 엄마가 큰 딸을 바라보면 작은 딸이 불만이고, 작은 딸을 바라보면 큰 딸이 불만이었습니다. 아빠에게 큰 딸이, 엄마에게 작은 딸이 누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엄마에게만 갑니다. 엄마가 두 딸을 동시에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시는 공평함은 마음의 크기의 공평함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할 때, 모든 것을 숫자상 똑같이 해줄 수 없고, 목회자가 모든 성도들을 일률적으로 심방하거나 만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녀들을 사랑하는 그 부모의 마음의 크기는 공평할 것입니다.
어느 날 우리 가정에서 딸이 공평함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왜 자신에게는 남동생에게 해주는 것처럼 사랑해주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너를 사랑하는 것과 너의 동생을 사랑하는 것이 같지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너와 너의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다!”
우리가 소망하는 좋은 세상의 모델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6절에 보면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강자와 약자가 사이좋게 어울려 사는 세상, 즉 천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절에 보면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잘 흐르도록 하려면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왕이면 좋은 대학에 가고, 부자가 되고, 권세를 갖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지력, 재력, 권력을 가지고 차별된 사회를 개혁해서, 모든 분야에서 막힘이 없이 잘 흐르도록 하는데 기여하는 인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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