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이라는 부끄러운 과거사를 직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던 ‘독일의 도덕적 양심’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이 향년 94세로 서거했다. 1984~1994년 서독 및 통일 독일 대통령을 지낸 그는 2차대전 종전 40주년 기념 연설에서 나치 독일의 어두운 과거사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역설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당시 “과거에 대해 눈 감는 사람은 현재를 볼 수도 없다. 독일인은 꾸밈이나 왜곡 없이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제대로 된 회고 없이는 화해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1990년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와 함께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상징적 의미에 머물렀던 독일 대통령직의 영향력을 확장한 인물로 평가된다.

   독일이라고 과거사 반성에 국내의 정치적인 부담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2차대전 당시 심한 보복을 당해 독일도 피해국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1945년 2월 드레스덴 폭격이다. 영국과 미국은 폭격기 722대로 3900톤의 고폭탄과 인화물을 투하했다. 당시 나치 선전기관은 무고한 피란민을 중심으로 20만 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전후 철저한 조사로 사망자를 최고 2만5000명으로 수정했지만, 이날을 전후해 독일의 일부 세력은 연합군의 사과를 요구하기도 한다. ‘실향민’도 정치적 부담이었다. 전후 독일이 폴란드, 러시아에 떼준 영토의 주민은 물론 수백년 전부터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등에 이주해 살았던 독일계의 후손도 지금의 독일 땅으로 추방됐다. 그 숫자는 1천만 명이 넘고 이 중 50만 명 정도가 추방 도중에 보복 학살됐다. 이들과 그 후손의 일부는 전후 ‘우리는 피해자’라는 인식 속에 영토 수복을 요구하는 세력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정치인들은 달랐다. 9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실향민의 날’ 행사에서 당시 헤어초크 대통령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이날 “민족반역자” 소리를 들으면서도 “동 로이센, 상슐레지엔, 동 포메른에서 태어난 독일인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국제법상 이곳은 현재 폴란드와 러시아의 땅”이라며 “우리는 옛 독일 영토를 영구히 포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많은 실향민들이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지만 대통령은“독일의 진정한 발전은 주변국들과 선린우호를 더욱 다지는 데 있지 현실성 없는 옛 땅 회복이나 부르짖는 데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런 대통령이 정한‘희생자 추념의 날’이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그 20년 동안 독일이 유럽연합(EU)의 구심점으로서 존경받는 나라가 된 것은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헤어초크, 메르켈 등 큰 정치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 수용소에서 해방된 지 70년이 되는 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년을 맞아 나란히 전쟁 범죄 청산의 부채를 지고 있는 독일과 일본의 행보가 극명히 엇갈리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달 26일 베를린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인도주의에 반한 범죄는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당시 행했던 끔찍한 행위들에 대해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기억하는 것이 독일인의 영구적인 책임이다”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가 작년 12월 총선에서 이긴 뒤 첫 해외 방문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택한 것은 평화와 인권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색칠해보려는 정치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베 총리와 정권 주역들이 집권 후 2년여간 해온 언동을 살펴보면 이게 과연 같은 사람의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70~80년 전 군국주의 일본은 아시아 제패 야욕에 사로잡혀 동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나치 정권이 유럽에서 홀로코스트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일본은 한반도에서 수만 명의 젊은 여성을 군대 위안부로 강제 동원해 중국과 동남아로 끌고 다녔다. 수십만 한국인을 병사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노역자로 징용했다. 당시의 참상은 위안부 할머니들과 징용 피해자들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베 총리는 이런 전쟁 범죄를 지우는 일에 몰두해왔다. 그는 2012년 총리 취임 후 한국과 중국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戰犯)들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작년 6월에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를 사실상 부정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최근엔 미국 교과서의 위안부 관련 내용 정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그가 홀로코스트 추모관에선 민족 차별의 잔혹성을 말하고 인권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공헌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위선도 이런 위선이 없다. 그리고는 지난주  아베는 급기야 8월 발표할‘패전 70주년 아베 담화’에 과거사 반성 문구를 넣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 문구를 넣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다.

   혹시 아베 총리와 그의 무리들은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것이 아닐까. 스톡홀름 증후군은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일어난 인질강도사건에 연유한 정신과 용어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4명의 무장강도가 은행에 침입해 직원들을 인질로 잡고 6일동안 경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인질은 처음에는 인질범들을 무서워했으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인질범들을 옹호하고 그 인질범과 사랑에 빠져, 오히려 자신을 구하려는 경찰에 대항해서 싸운 것에서 유래된 비이성적인 심리상태를 말한다. 한마디로 가해자의 입장을 공감하는 현상이다. 아베 정권 주역들의 머릿속엔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지 않았더라면 전범 국가가 되는 일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아베 본인도 “침략에 대한 정의가 (국가마다) 다를 수 있다” 같은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들은 일본을 ‘전쟁하는 나라’로 바꾸기 위해 헌법 해석 변경이라는 기묘한 방식까지 감행했다. 아베 정권이 종전 70년인 오는 8월 15일 내겠다는 새로운 담화도 이런 차원에서 준비될 가능성이 크다. 세계적 지도자들이 말했듯이, 일본의 미래가 불투명한 이유는 아베와 같은 정치인이 판을 치며 반성은 커녕, 되려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싣는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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