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남은 구원했으나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구나”(막15:31) 이 말이 십자가 밑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조롱이었습니다. 또 바울은 남에게는 구원을 전하고서 자신은 그 구원에 참여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언제나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고전9:27). 그런데 예수님은 남을 구원해 놓고 정작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조소를 받았으니 “능력의 주님, 기적의 주님, 구원의 주님”은 예수님의 전체상이 아니라, 일부의 모습일 뿐입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 나았고, 야이로의 딸도 말씀 한마디로 일으켰고, 오병이어로 5,000명도 먹이셨고, 말씀 한마디로 풍랑의 바다를 잠잠케 하셨고 나인 성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도 살리신 능력의 주님께서 지금 십자가상에서 속절없이 무능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원수들의 조롱거리만은 아니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 그의 수많은 기적을 보았던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과 의문이었습니다(가롯 유다가 예수님의 계신 곳을 알려준 이유도 사실은 예수님을 핍박한 상황 속으로 몰아넣어 그로 하여금 권능을 베풀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해석이 이천년 동안 줄곧 없어지지 않는 주장이다). 

    왜 그때 예수님은 권능을 나타내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를 경호하려고 칼을 사용했을 때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당장 12군단 이상의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마26:53)고 말씀하셨던 주님,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랬더라면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도 믿고 구원 받았을 것이 아닙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이천년의 교회의 전통적인 대답은 첫번째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인류대속의 대업을 완수하지 못합니다. 둘째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이루려 함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예수님의 생애 중에 수많은 기적을 베풀었지만 그 중 제일 큰 기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뛰어 내려오지 않은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말하기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 오시지 않은 것이 의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구주되심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남도 구하고 자신도 구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사랑의 화신인 그 분은 남을 위하여 그의 에너지를 다 소비해 버리고 자신을 위해 남겨 둔 것이 없습니다.  그가 전능일 때는 남을 구할 때입니다.  그가 자기의 유익을 꾀하기 위하여 기적을 행했다는 말은 성경 전체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장’이라고 알고 있는 고전13장을 자주 대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라는 대목에서 감격하여 더 그 뒤를 읽어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부부생활, 부모에 대한 효도를 한번 반성해봅시다. 연애 시절에는 상대방에게 모두 주고 싶고 내 가진 것 다 주고 싶고, 좀더 친절히 해주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것을 훔쳐서 애인에게 갖다 줍니다.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불타고 있을 때의 현상입니다. 그러나 결혼하여 오래 살면 “우리 남편은 왜 친구네 남편처럼 다정다감하게 해 주지 못하는가”, ”우리집 사람은 왜 아무게 엄마처럼 남편과 아이들에게 살뜰하지 못하는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또 다투기도 합니다. 그것은 배우자가 나빠진 것이 아니라 내 편에서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때는 주고 싶고, 사랑이 식을 때는 받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비판적인 시선으로 상대방을 쳐다볼 때는 내 마음이 병든 때요, 내 마음의 사랑의 샘이 고갈 된 때입니다. 삶의 스타일과 가치관은 교과서로 외워서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모방(imitation)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간디는 이가 없이 합죽이로 노년을 살았습니다. 치과의사가 틀니를 해드리겠다고 하자 거절하면서 “인도의 국민 중에 돈이 없고 가난하여 틀니를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이 다 틀니를 할 때까지 나는 틀니를 안하겠소”라고 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유산은 두가지 뿐이었습니다. 하나는 밥그릇 또 하나는 실 뽑는 물레. 그래도 간디는 유산이 둘이나 있어서 부자입니다. 거지도 죽으면 자기 무덤에 들어가는데 우리 주님은 무덤도 남의 것에 빌려 들어가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흔한 런닝셔츠도 걸치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석유 재벌 죤 콜게티는 40억불의 재산을 남기고 갔습니다. 락 뮤직의 우상 엘비스 프래서리는 70억을 유산으로 남겼고 하워드 휴즈는 20억불의 재산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감동’을 남기고 간 죽음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서 감동과 은혜를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는 힘을 쓸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희생이요, 버리는 것입니다(Love is Leave= ,버리는 것, 떠나는 것). 아들이 태어나서 아버지를 부르는 명칭이 나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들이 어릴 때는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다가 어른이 되면 ‘아버지’라고 부르고 더 나이 들면 ‘아버님’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아바)’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인데 이런 칭호가 구약시대 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으니 그것은 자신을 가장 낮추어 무능한 어린아이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는 아이의 무능(無能), 의존(依存), 응석의 분위기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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