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왔다. 인천공항에 내려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김포 공항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왼쪽으로 골프장이 보였다. 한 홀에 사람들이 왜 저렇게 많이 서 있지 하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돌려 가만히 보니 캐디와 함께였다. 보통 미국 골프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캐디들을 보니 한국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렀다. “어서오세요” 하는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일명 총잡이(기름을 넣어주는 아르바이트생)가 달려와 주유구를 열어 기름을 가득 채워준다. 미국에 살면서 차에서 내려 직접 기름을 넣는 일을 번거롭게 생각해왔던 필자에겐 여간 편리한 일상이 아닐 수 없다. 역시 한국에서 고객이 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우리 네식구는 부산에 있는 부모님 집에 머무르고 있다. 보고 싶었던 가족들은 매일매일 모여 저녁식사를 함께 즐기며 가족의 정을 나누고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공원에서 하루를 보냈고, 여태껏 한번도 제주도를 가보지 못한 필자의 남편을 위해 다음주에는 제주도로 떠난다. 게를 좋아하는 필자를 위해 동해안의 무한리필 대게집을 찾기도 했으며,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먹고 싶었던 한국 음식을 실컷 먹어보겠다는 남편과 아이들은 돼지국밥, 선지국밥, 짜장면, 짬뽕, 온면, 재래시장에서 파는 순대와 파전, 빈대떡, 치킨, 오뎅, 호떡, 비빔당면 등을 찾아먹느라 하루가 빠듯하다.

     이틀동안 서울에도 잠깐 다녀왔다. 한국의 방송사와 신문사에 재직 중인 신문방송학과 학교 선배들을 만나 참으로 오랫만에 필자가 좋아하는 막걸리를 다함께 한잔 했다. 벌써 20년이 흘렀다. 정의로운 언론 사회를 구현할 것이라며 동시대의 번뇌와 미래에 대한 열정을 술잔에 담아 건배했던 시절이 말이다. 당시 이러한 동지들이 있어 우리들의 미래는 외롭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신문을 들여다보면서 주요 일간지와 지방신문 간의 헤드라인 뉴스를 비교분석했었다. 각 신문사에서 중요하게 다룬 뉴스와 중요하지 않게 다룬 뉴스를 구별하는데 하루의 절반을 소비했다. 기사의 중요도는 제목 글자체의 크기와 기사의 분량, 지면 배치, 그리고 편집 방향에 따라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신문에서 사용하지 말아야하는 금지어들, 판이하게 다르게 작성되어야 하는 일반 기사와 오피니언 기사 작성 방법, 헤드라인 제목을 뽑을 때 주의해야 하는 사항, 사진 설명을 처리하는 방법, 인터뷰 기사를 작성할 때의 형식,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할 때 유의점 등 정석 신문을 만들기 위한 이론을 우리는 일상처럼 듣고 배우며 익혔다. 그러나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기자와 이를 판단하는 데스크의 역량이다. 사람이 올바를 때 글도 올바르게 나온다는 선배님들의 말은 지금까지도 진리로 통한다. 필자가 학교에서 신문학을 배웠을 때에는 대부분 미국 언론사를 중심으로 배웠다. 왜냐하면 한국의 신문방송학과 교수들은 다수가 미국에서 수학을 했기 때문에 한국 언론의 역사와 이론 교과서는 미국 저널리즘의 역사와 이론을 바탕으로 집필되어졌다고 해도 무방하다. 세계 각국의 언론 동향에 대해 연구해놓은 교과서를 살펴봐도 미국의 저널리즘 방향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이 주를 이룬다.

      선배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가판대에 즐비하게 꽂혀있는 신문들 중에 네개 신문사의 신문을 선별해서 샀다. 그 옛날 그렇게 열심히 분석해봤던 신문들인데도 낯설었다. 신문에는 틀린 글자도 없었고, 근거없는 낭설도 없었으며, 지난 하루 동안 발생했던 사건 사고와 무한한 정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무엇보다도 신문의 역할을 소신있게 지켜나가고 있는 신문들 같아서, 필자의 현실이 다소 부끄러워졌다. 필자를 싫어하는 몇몇에게는 껄끄럽고 인정하고 싶지 않는 부분일 수 있겠지만 학력과 경력의 잣대로 보아서는 필자는 분명 저널리즘 전문가이다. 이곳 콜로라도의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언론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20살부터 신문을 만들어온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콜로라도 한인 신문사들은 신문을 제작하는 인적 능력에 한계가 있다. 사실 확인절차를 거치지 않은 뜬금 없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고, 100 % 정확한 사실조차 거짓으로 바뀌기도 한다. 때로는 개인 일기장에나 쓰여지는 원한풀이식 기사들도 등장한다. 선배들은 이런 신문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믿기 어려운 눈치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주요 언론사에서 중역을 맡고 있는 그들로서는 더욱 이해가 안되는 신문의 모습일 것이다. 선배들은 마지막 잔을 부딪히면서 “신문을 공부한 너라도 꿋꿋하게 정론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씀을 가슴깊이 새겨 주셨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주변의 잡음에 흔들림없이 가야하는 정론의 길을 말이다. 열정도 사라졌었다. 20여년전 사회부 수습기자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맡은 첫번째 사건은 존속살인사건이었다. 부모를 끔찍하게 죽이고 사체의 일부를 손상시켜 냉동실에 넣어둔 채, 짜장면까지 주문해서 먹은 사이코 아들이 체포되던 날, 필자는 그 현장을 방문했다. 먼저 다녀온 선배들이 굳이 갈 필요없다며 극구 말렸지만, 생동감 있는 기사를 한 줄이라도 더 보태기 위해 찾은 현장은 끔찍했다. 거실 바닥은 온통 검게 변해버린 피바다가 되어 있었고 냉장고 안 바가지에 담겨 있는 뇌의 일부를 보고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5개월 정도의 사회부 수습기간을 마치고 정치부 수습기자로 옮겨 국회를 출입했다. 매일 싸우는 국회의원들 때문에 한달에 한번도 국회에서 주재하는 회의를 제대로 보도한 적이 없었다. 툭하면 협상결렬과 대화단절, 소통불가를 내세우며 폐회하기가 일쑤였지만 우리 기자들은 항상 대기상태였다. 혹여 의원들의 마음이 바뀌어 오후 늦게라도 회의가 열리면 다른 신문보다 더 자세한 기사를 한줄이라도 추가할 수 있을까봐 국회 직원들의 퇴근 시간때까지 기다린 적도 있다. 돌이켜보니 이렇게 열정적으로 뛰어다녔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이번 한국 방문은 오래된 동료들을 만나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너덜너덜해진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을 재발견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자칫 잊혀질뻔 했던 언론인으로서 덕목을 기억해낸 귀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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