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산(巨山) 김영삼(金泳三)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22일 88년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서거(逝去)로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왔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양김 시대도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우리 현대사에 남긴 족적은 크고도 깊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대한민국의 고난과 성공, 좌절과 영광의 시대를 이끌어온 정치 거목이었다. 이회창 전 총리의 말대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호‘거산(巨山)’만큼이나 거대한 산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인생과 정치 역정은 우리 현대사와 함께 했다. 그는 일제의 식민 지배 시기에 성장기를 보냈고, 한국전쟁을 겪었으며, 간첩의 총탄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정치에 투신한 이후엔 꺾이지 않는 집념과 투지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이런 고통을 이겨낸 그가 없었더라면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도‘절반의 성공’에 그쳤을 것이다. 

    그는 35년간의 야당생활을 투쟁으로 일관해왔다. 김 전 대통령은 26세의 최연소 의원과 9번의 최다선 의원이란 기록을 갖고 있다. 그는 1960년대 초 군정 연장 반대 집회로 수감된 이후  한결같이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개헌 반대 투쟁 중엔 초산 테러를 당했고 1979년엔 의원직 강제 제명을 당했다. 이 사건은 부산, 마산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유신 정권이 끝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83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23일간의 단식 농성으로 정국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결국 군부 정권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민주화의 거센 흐름은 1987년 6·29 선언을 만들어 내게 된다. 암울했던 시절 우리 국민들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며 투쟁의 선두에 섰던 김 전 대통령을 보면서 희망을 품었다.

    김 전 대통령은 긴 민주화 투쟁 여정에서 항상 절충과 타협으로 국면을 이끌어왔다. 그는 점진적 개혁주의자로서 군인 정권의 중심에 있던 민정당과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3당 합당을 통해 여소야대 정국을 거여주도로 바꿔놓았고, 중학생 시절 책상머리에 써놓았던‘미래 대통령 김영삼’의 꿈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3당 합당을 추진하면서 야당 진영에 함께 몸담았던 이들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도 받았으나 결국 군부정치 종식과 대통령직선제를 통한‘문민정부 탄생’이라는 역사적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고인의 정치 역정에는 빛만이 아니라 어두운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무엇보다 그는 고 김대중 대통령과 더불어 우리 정치를 지역주의의 늪에 빠지게 한 장본인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두 사람의 후보 단일화 실패는 민주세력의 분열은 물론 지역갈등을 고착화하는 결정적 갈림길이었다. 부마항쟁으로 한때 ‘민주화의 성지’라고 칭송받던 지역은 이제는 보수 정치 세력의 텃밭이 되고 말았다. 이에 비하면 그가 대통령 재임 시절 나라를 외환위기에 빠지게 한 잘못 등은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과오 때문이었는지 김 전 대통령은 병석에 누워 붓글씨로‘통합’과‘화합’을 쓰곤 했다 한다. 이것이 그가 국민에게 마지막 남긴 유언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가 이 유언에 담겨 있다. 분명 그와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의 동지이자 경쟁자였다. 독재에 맞서는 데는 손을 잡고 싸웠지만 대통령 자리를 위해서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대통령 자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대한민국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는 평가에 무게를 실어본다. 이미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과거에서 벗어나 동지로 돌아갔다. 사실 양김의 상도동계, 동교동계는 현재의 계파정치에 비하면 차라리 단출했다. 친박, 비박, 진박, 가박, 용박까지 갈수록 세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양김 시대에 꼭 해야 했던 정치개혁을 못한 결과 한국 정치는 아직도 민주적 리더십 형성이라는 힘든 과제와 씨름하고 있다. 그러나 양김시대의 종식으로 인해 그동안 국민 화합을 막아온 지역감정의 종식에도 기대를 걸어본다.

    거산의 서거 이후 국내외 언론들은 매체의 색깔과 상관없이 일제히 그의 업적을 칭송하며 애도를 표하고 있다. 오랜세월 야당에서 현 정치를 비판해온 그였지만, 그 또한 대통령이 되면서 비난을 받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거산은 유신 정권과의 정면 대결, 목숨을 건 단식, 3당 합당, 전두환 노태우의 성공한 군사 쿠테타의 응징 등 결정적 시기에 모든 것을 던진 승부사였다. 김 전 대통령 서거로 모두 7명의 전직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하게 됐다.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절대 폄훼해선 안된다. 혼란 속에서 나라를 건국하고 빈민국을 세계적 산업국가로 변모시켰으며 민주화와 개혁을 이룩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대한민국의 진정한 화합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거산은 자신의 인생에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민주화를 이뤄낸 일이고, 다른 하나는 60년 전 손명순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 일이라고 회고했다. 대통령이 되면서“저는 상도동에 집 한 채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가 물러나더라도 옛날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도동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약속대로 퇴임 후 상도동의 집으로 돌아갔고, 아내 손 여사의 곁에서 영면에 들었다. 역사적 인물의 삶을 되돌아보면 그 화려한 영광에는 몇 갑절의 번민과 고뇌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고인의 정치적 생애도 그런 좌절과 성공이 수없이 반복되었으리라. 그 역사적 영광은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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