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서구의 사상계와 신학계에서는 고독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큰 테마가 되어 있습니다. 미국문화 속에 반려동물을 사랑하고 꽃을 열심히 가꾸고 자주 파티를 열고 하는 것은 인간 밑바닥에 흐르는 외로움과 관련이 적지 않습니다. 리즈맨(David Risman)은 ‘군중 속의 고독’을 말했으니, 고독은 산(山)에 있지 않고, 인파가 흐르는 거리에 있으며, 고독은 한 인간 내부에만 있지 않고 인간들의 ‘사이’에 있습니다.
현대인은 점차 ‘외부지향형’의 인간이거나 ‘전파탐지기형’의 인간이 되어갑니다. 외부지향형의 인간은 남의 행동에 매우 민감하고 사고와 행동양식의 획일화가 강요당하므로 ‘표준형’. ‘평균치’라는 것이 유행하게 되어 자신의 알갱이는 비어 있고 공허감, 고독감을 맛보게 됩니다. 전파탐지기형의 인간은 외부에서 발산되는 신호를 재빨리 포착하여 스스로의 행동을 그것에 적용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여기에 뒤지게 될 때 심한 불안을 느끼게 되고 또 고독감을 가지게 됩니다. 또 현대인은 고독의 중압감으로부터 도피하려고 이러 저러한 모양의 위안제(술, 도박, 유흥가)를 찾지만 그것에서도 고독은 치유되지 않고 심화될 뿐입니다. 목회경험 가운데 “인간은 늙으면 외로워진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어차피 부부는 한 날 한시에 죽지는 못하므로 살아 남은 한 편은 외롭게 살게 마련이고 자식의 효도를 옛날처럼 받지 못하니 인간은 늙어서 외롭기 마련입니다. 남자의 경우 65세가 넘어서 배우자를 잃으면 2년 안에 상당한 숫자가 죽게 됩니다. 2년의 고독을 용케 견뎌낸 사람이라도 재혼하지 않으면 그 고독은 참으로 혹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려깊은 자녀의 효도는 홀로된 부모의 재혼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과부도 재혼하라 했는데(고전7:39), 교회는 오히려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쳐야 할 것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정의 때문에 고독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많은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남을 위해서만 일하셨건만 사람들로부터 사랑은 커녕 미움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요7:5). 어찌하여 형제도, 고향도, 제자도, 민중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을까요? 그 이유를 본문은 “세상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내가 세상에 대하서 그 하는 일을 악하다고 증거하기 때문”(요7:7) 아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행실이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빛을 싫어하며 빛으로 나오지 아니합니다(요3:19-20). 예수님이 발하는 빛이 너무 강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워했습니다. 부엉이와 지렁이는 햇빛을 싫어합니다. 박쥐나 야행성 동물은 낮을 싫어합니다. 속인은 깨끗한 자와 같이 한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합니다.
고결한 초월성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만 따랐지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 분에게는 “내 파”, “내 당”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당파를 만들고 ‘내 편’, ‘네 편’을 만들고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고 계보를 따집니다. ‘내가 없을 땐 당파도 없어집니다. 사람들은 당파를 위해 헌신하는 것같지만 모두가 이기심이 그 동기입니다. 당파는 본업이 싸우는 것이므로 아무 당파에도 속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공동으로 미워했습니다. 그들의 미움은 반은 두려움에서 온 것이요, 반은 질투에서 온 것입니다. 본문은 출세지향적인 동생들이 형을 공박하는 장면입니다. 골육을 몰라 보고 집안을 배반하고 도의에 어긋난 형을 동생들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막3:21). 예수님은 고향에서도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그 분은 지연에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흔히 있는 식의 애향심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애향심의 뒷면은 배타심이요 지방색입니다. 고향에선 미움받아 기적도 행하지 못했으며, 사람들은 거리 밖으로 끌어내고 산꼭대기 절벽에서 떨어뜨려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눅4:23, 29). 고향사람들은 고향 나사렜을 예수님이 선전해 주기를 바랬으나 그는 한 고을의 허영심을 위한 도구가 되기를 거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라와 조국에서도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나사렛의 예수’도, ‘갈릴리의 예수’도, ‘유대인의 예수’도 아니셨습니다.  그는 평생 국사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여 우시기는 했으나 독립을 위해선 작은 기적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애국심에 불타는 약소국민, 피압박 민족인 동족의 분노를 사기에 족했습니다.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