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시인 로버트 헤릭(Robert Herrick)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고기 저장고를 비우고 / 송아지 고기와 양고기를 / 채우는 것이 금식입니까? / 고기 접시를 치우고 / 큰 접시에 대신 생선을 / 채우는 것이 금식입니까? / 한 시간 금식하고, 허기진 채로 걷는 것 / 아니면 눈을 내리 깔고 초췌한 /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까? / 아닙니다. 그대의 밀 한단과 고기를 / 굶주린 영혼에 /베푸는 것이 금식입니다. / 참된 금식은 다툼과 / 해묵은 논쟁과/ 미움의 끝을 내고 / 그대의 생명에 할례를 행하는 것 / 애통함으로 그대의 마음을 찢고 / 그대의 위장이 아니라 / 죄를 굶주리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감정’이 아니라 명백하게 돌이키는 ‘장소’입니다. 가롯 유다가 회개하지 않아서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은 삼십에 판 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에게 넘어가는 것을 보고 그는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삽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그러나 그들이 그 가롯 유다의 뉘우침을 거부하자 그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는 물러가 스스로 목메어 죽습니다(마27:3). 성소가 아니라 피밭으로 간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용서의 은혜보다 자신의 죄책이 더 컸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죄가 크면 죽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짓는 가장 큰 죄는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회개와 용서라는 문을 통과해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기의 강함과 약함을 계산하고 진단하는 사람은 자신을 망각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잊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잊는 것이 믿음의 중요한 본질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와 함께 함을 믿습니다. 내가 얼마나 의로운가. 혹은 더러운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은혜의 도구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주변에 늘 자기를 증명하려 합니다.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를 두르고 자기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보여주려고 하는 그 모습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요. 결국 그런식으로 끝없이 자기를 증명하는 일은 결국,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까지 망치고 맙니다. 하나님 사랑의 위로를 모르고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사람은 늘 허기집니다. 그런 허기는 아무리 좋은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고, 냉장고에 고기를 채워 넣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만이 안식을 누립니다. 그런 사람만이 위장할 필요 없이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를 좋은 쪽으로 변하게 하는 유일한 힘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합니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는 받는다. 고로 존재한다’의 공식입니다. 먼저 ‘받는 것’ 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요13:1-17) 이야기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느냐?’ 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랑이 너무 송구해서 거부하지만, 예수님이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 앞에 곧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하며 온 몸을 내밀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노력하여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단점과 죄의 부패성을 알지만 예수님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깨끗함’입니다.

       선행을 베푸는 것보다 은혜를 믿는 것이 더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좋은 일을 할 때, 우리의 시선은 자신을 향합니다. ‘이 정도는 해야지’ 하지만 이런 태도에는 사랑 받음의 본질인 ‘자기 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발을 씻겨 주는 모습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연습을 합니다. 이런 연습은 내게 다시 한 번 묻습니다. ‘네가 이 사랑을 감당할 수 있겠니?’ 그때 나는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한마디면 됩니다. 그때 나는 주님 안에 들어갑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내려오셔서 가능한 것입니다. 내 앞에 무릎꿇고 내 발을 씻기는 예수님과 만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행동해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발을 씻기도록, 그냥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선해집니다. 깨끗해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오시면 내가 깨끗해집니다. 은혜를 ‘획득’해야 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보상’입니다. 은혜란 벌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점수를 모아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믿기만 하면 모든 일이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풀리리라 생각하는 것은 은혜를 믿는 것이 아니라 ‘마법’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받는 것이지만, 은혜를 담을만하도록 자기를 비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망각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내가 없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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